글자 크기 설정

 무국적자 낳는 베네수엘라 난민 사태 
콜롬비아로 피란 온 베네수엘라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딸 줄레이디스 안토넬라 프리메라가 출생신고를 하기 위해 콜롬비아 쿠쿠타에 있는 병원에서 발 도장을 찍었다. 줄레이디스는 베네수엘라 국적도, 콜롬비아 국적도 없는 무국적자다. 쿠쿠타=AP 연합뉴스
줄레이디스의 생모 아렐리스 풀리도가 2개월 된 딸은 안은 채 출생신고를 하고 있다. 쿠쿠타=AP 연합뉴스

세상에 나온 지 2개월, 아기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첫 공식문서를 받았다. 발바닥으로 눌러 찍은 검은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아기의 출생증명서에는 ‘국적 획득 자격이 없음’이라 적혀 있다.

콜롬비아로 피란한 베네수엘라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줄레이디스 안토넬라 프리메라는 어느 국가로부터도 국민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무국적자’다. 태어나 보니 부모가 난민이었던 이들은 난민보다도 못한 존재로 삶의 여정을 시작한다.

콜롬비아 인구관리청은 2017년 12월부터 최소 3,290명의 무국적자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물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출생 신고를 마친 아이들만 집계된 수치이기에 실제 출생 아동들의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경제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해진 베네수엘라를 떠난 난민의 수는 300만명에 이른다. 이 중 130만명이 인접국인 콜롬비아로 향했고, 콜롬비아에 발을 들인 베네수엘라인 중 40%는 영주권, 비자, 난민 자격을 비롯한 그 어떤 법적 지위도 없는 불법 체류자다.

피란 생활 중 태어난 아이들은 베네수엘라로 돌아가거나 현지의 베네수엘라 영사관을 찾아가 출생 신고를 해야 모국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러나 목숨 걸고 오른 피란길을 돌아가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베네수엘라 정부가 주콜롬비아 영사관을 폐쇄했기에 역시 불가능하다. 아이들의 출생 국가인 콜롬비아는 부모가 콜롬비아인이거나, 콜롬비아 영주권을 취득한 외국인일 경우에만 시민권을 준다.

아렐리스 풀리도가 2일 콜롬비아-베네수엘라 국경지대의 병원에서 품에 안은 줄레이디스의 출생증명서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아렐리스는 피란길에 오르기 전 의료 환경이 열악한 베네수엘라에서 출산한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다. 쿠쿠타=AP 연합뉴스
베네수엘라군 장교 출신인 줄레이드스의 생부 호세 안토니오 프리메라가 콜롬비아 쿠쿠타에 마련한 거처에서 국적이 없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있다. 쿠쿠타=AP 연합뉴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해질 것을 난민 부모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콜롬비아가 그나마 최선의 선택지이기 때문에 임신 상태에서도 피란길에 오르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는 콜롬비아, 브라질, 가이아나다. 출생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남아메리카의 맹주 브라질은 베네수엘라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지대 군사 배치를 대폭 강화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브라질에서 보낸 구호 물품을 전면 거부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더 악화됐다. 가이아나는 경제 규모가 콜롬비아의 10%도 되지 않는 만큼 난민을 수용할 여력이 부족하다. 더구나 베네수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베네수엘라가 가이아나의 서쪽 영토를 탐내며 영토분쟁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콜롬비아는 1964년부터 정부군, 혁명군, 범죄조직과 준군사조직이 끊임없이 격돌하며 수많은 난민을 배출했다. 이 중 상당수는 인접국인 베네수엘라에 정착했다. 2016년 평화조약이 체결됐을 때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나빠지며 두 국가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 난민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무국적자 신생아들에게 1년까지 무상 의료지원을 제공하고, 이후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정규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전직 경찰관인 에두아르도 브라보가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의 출생증명서를 받기 위해 2일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다. 쿠쿠타=AP 연합뉴스
에두아르도 브라보가 2일 병원 계단에서 마찬가지로 출생신고를 하러 온 아이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쿠쿠타=AP 연합뉴스

유엔난민기구는 10분에 한 명꼴로 세계 어딘가에서 또다른 ‘줄레이디스’가 태어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발간한 보고에 따르면, 가장 많은 수의 무국적자를 수용하고 있는 상위 20개국에서만 연간 최소 7만명의 무국적자가 태어나는 것으로 파악됐다.

소속 없이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기에, 각국은 무국적자 사태에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태어나 보니 무국적자’인 아동들을 보살피는 것은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 브라질처럼 출생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은 부모의 국적, 법적 지위와 관계없이 신생아들을 자국민으로 취급한다. 혈통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원칙적으로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부모가 모두 무국적자인 ‘무국적 2세’의 경우에 한 해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한다. 베네수엘라 사태가 장기화되자 콜롬비아 정부는 2015년 8월 이후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베네수엘라 아동에게 콜롬비아 국적을 부여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콜롬비아 의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법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차원에서도 1961년 무국적자 감소에 관한 협약을 채택해 현재까지 70여개국이 서명했다. 협약에 서명한 국가는 자국에서 태어나거나 발견된 아동, 자국민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동이 다른 국가의 국적을 취득할 수 없을 때 자국민으로 취급하도록 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출신 피란민이 6일 유엔난민기구가 콜롬비아 마이카우에 마련한 난민캠프에서 아이를 안은 채 눈물을 닦고 있다. 마이카우=로이터 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출신 피란민이 6일 유엔난민기구가 마련한 콜롬비아 마이카우 난민캠프에서 서류를 작성하는 직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마이카우=로이터 연합뉴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