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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서 농성하던 78세 쓰러져 실려가

‘북한 개입’ 주장한 지만원 재판서도 모욕 발언

“증명해라” 도 넘은 명예훼손 판쳐... 책임 물어야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지만원(가운데)씨가 법정으로 걸어가고 있다. 지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고 주장한 혐의로 기소됐다. 서재훈 기자

“1980년 6월 광주대교구 사제단 이름으로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부하셨죠? 처벌받지 않았습니까?”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525호 형사법정. 상대를 을러대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서 숨진 시민들을 찍어둔 사진이 실은 북한이 날조한 가짜 사진이란 주장 때문에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지만원씨 재판이었다. 지씨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소속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의평화위’) 신부들이 1987년 발행한 5ㆍ18사진첩에 담긴 주검 사진을 문제 삼았다.

법정이 소란스러웠던 건 검사가 피고인 지씨를 날카롭게 몰아 부치거나 질타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씨측 변호인이 증인으로 나온 정형달 신부를 몰아세우는 질문들이었다. 정 신부는 5ㆍ18 당시 정의평화위 소속 신부로 5ㆍ18 왜곡 모독 행위를 참다 못해 지씨를 고소한 정의평화위측 인물로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지씨 측은 거침없었다. 정 신부 등 천주교계 인사들의 북한 관련성 여부나 과거 처벌 전력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재판 내용과 무관하니 그런 질문은 그만 하라”는 재판부의 제지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5ㆍ18 피해자와 유족들은 괴로워했다. 지씨측은 재판 내내 참혹한 사진을 보여주며 “광주 신부들이 공개한 5ㆍ18 주검 사진은 북한에서 만든 것이지 광주시민이 아니다” “이 사진은 북한 신천박물관에 걸린 선전화와 비슷하다” “이 사진은 1982년 북한이 뿌린 삐라의 사진과 비슷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북한이 시체 얼굴을 짓이겨 만든 가짜 사진을 고스란히 받아쓴 광주 신부들은 북한의 앞잡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었다. 지씨가 사진 속 자신을 ‘북한 특수군’이라 지목해 소송을 제기한 백종환(57) 5ㆍ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이사는 “법정에서까지 저렇게 5ㆍ18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게 어처구니 없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39주년을 맞이한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울분에 가득 차있다. 이들을 괴롭히는 건 39년 전 그날의 폭력과 상처만이 아니다. 지씨를 비롯, 국회의원부터 보통 시민까지 이미 밝혀진 5ㆍ18 역사를 부정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피해자들에게 “당신 진짜 피해자 맞냐?”고 피해자들을 추궁해대는 사람들 때문이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가 또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 것 같아 괴롭다.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5ㆍ18 당시 피해사진을 전시하며 농성 중이던 5ㆍ18피해자들을 찾아간 채널 ‘상진아재’ 운영자 유튜버 김상진씨가 “이 사진 피해자가 5ㆍ18 때 죽은 사람 맞냐"고 묻다 제지강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정말 5ㆍ18 피해자가 맞는지 어디 한번 증명해보라”는 조롱과 비난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차려진 5ㆍ18 피해자 농성장에도 쏟아진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협박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채널 ‘상진아재’의 유튜버 김상진씨도 여의도 농성장을 수 차례 찾아와 “사망자 사진 출처가 어디냐” “5ㆍ18때 죽은 사람 맞냐”며 시비를 걸었다. 5ㆍ18때 맏아들을 잃은 이근례(78)씨는 “아들 잃고 ‘빨갱이’ 소리만 들으며 살아왔다”며 “의사는 ‘위험하니까 무슨 소리를 들어도 화내지 말고, 시끄러운 곳 가지 말라’고 하지만 망언을 들으면 참을 수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실제 이씨는 ‘5ㆍ18 피해자 맞냐’는 조롱에 항의하다 실신,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5ㆍ18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국회 정문앞에서 농성중인 오월 어머니회 회원들이 지난 1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기 앞서 관계자들의 정론관 출입을 요구하며 오열하고 있다. 뉴스1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5ㆍ18 망언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로 한달음에 뛰어왔는데, 농성장에서도 모욕당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5ㆍ18 유족들 사이에선 “이러려고 농성을 시작했나”라는 자조 섞인 한숨도 나온다. 추혜성 5월어머니집 이사는 “망언 국회의원에 대한 처벌도 징계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다”며 “결국 ‘망언’ 의원들만 영웅으로 만들어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5ㆍ18 피해자들이 요구해온 △‘망언’ 국회의원 파면 △5ㆍ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구성 △특별법 개정 통한 5ㆍ18 왜곡 및 비방 처벌 가운데 실현된 것은 없다.

학계에선 이런 피해자들의 분함도 국가적 해결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울분’을 연구해온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시민을 희생시킨 비극이란 점에서 5ㆍ18 피해자들의 울분은 약이나 처방을 내리는 의학적 접근을 넘어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으려는 의지를 보여줄 때 해소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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