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겪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왜 왜곡하고 폄하합니까”

입력
2019.05.13 04:40
수정
2019.05.16 15:4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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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석고 5회 동창생 등 광주 시민들 증언집 잇따라 출간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노동청 앞 시위로 전소된 차량들 사이로 자전거를 탄 시민들이 멀리 보이는 계엄군들을 바라보고 있다. 5ㆍ18기념재단 제공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노동청 앞 시위로 전소된 차량들 사이로 자전거를 탄 시민들이 멀리 보이는 계엄군들을 바라보고 있다. 5ㆍ18기념재단 제공

“총을 쏜다. 군바리들이 총을 쏜다.” 1980년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서석고 3학년생이었던 전형문(57)씨는 옛 전남도청 앞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집단발포 현장을 또렷이 기억한다. 비무장인 시위대와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이 푹푹 힘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씨도 통증을 느꼈다. 왼쪽 옆구리 아래 배꼽 밑 부분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지만 총탄을 꺼내지 못했다. 전씨 몸에 박힌 총탄은 그를 평생 괴롭히고 있다.

올해 39년째를 맞은 5ㆍ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1997년이다. 2011년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5ㆍ18은 신군부 세력의 정권 탈취 음모에 격렬하게 저항한 민주항쟁으로 국가가, 세계가 공인한 역사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5ㆍ18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세력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망동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5ㆍ18을 직접 경험한 광주의 평범한 시민들이 ‘5ㆍ18, 우리들의 이야기’ ‘녹두서점의 오월’이란 증언집을 잇따라 출간했다. 두 책을 펴낸 이들을 12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5ㆍ18, 우리들의 이야기’는 5ㆍ18 당시 고3 수험생이었던 광주서석고 5회 동창생 61명이 직접 겪었던 생생한 체험담을 엮은 것이다. 광주서석고 동창회가 지난해 3월 ‘5ㆍ18체험담기록위원회’를 구성해 당시 졸업생 중 연락이 닿는 380여명 중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원고를 정리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가 심해 5ㆍ18을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동창들의 얘기는 담지 못했다.

서석고 동창회장인 임영상씨는 “세월이 흐를수록 5ㆍ18의 진실이 사라질까 두려워 기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태극기 부대 집회에 30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나와 5ㆍ18에 참여한 광주 시민들을 폭도, 간첩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방관하고 침묵하는 사이 5ㆍ18을 폄하하는 목소리가 너무 커져버렸다”고 한탄했다.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를 시위대와 시민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상공에 헬기가 떠 있다. 5ㆍ18기념재단 제공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를 시위대와 시민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상공에 헬기가 떠 있다. 5ㆍ18기념재단 제공

왜 그동안 말하지 못했을까. ‘5ㆍ18, 우리들의…’ 책에 나온 생생한 증언을 보면 짐작이 간다.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공포였다.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전남대와 광주교도소에서 46일간 밤낮없이 구타를 당한 한 학생에게 군인들은 “밖에 나가 발설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부끄러운 방관자’란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들의 만류로 다락방에 갇혀 ‘가택연금’을 당했던 학생, 적십자 병원에서 헌혈 줄이 너무 길어 발길을 돌렸다는 이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미안한 마음에 입을 닫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39년 만에 터져 나온 증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5ㆍ18은 몇몇 사람이나, 특정 세력이 아닌 불특정다수 평범한 시민들의 항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5ㆍ18 증언집인 ‘녹두서점의 오월’을 펴낸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은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되자 시위대 지도부는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피신하려 했지만 시민들이 끝까지 흩어지지 않아 시위대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녹두서점은 5ㆍ18 당시 시민들의 상황실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시민들의 구체적 증언 앞에서 ‘북한 사주설’ ‘간첩 개입설’ 등과 같은 허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책을 통해 신군부가 ‘편의대’를 통해 광주 시민들을 사찰했던 사실도 처음 확인됐다. 편의대는 시위대 대원으로 위장한 뒤 사찰 활동을 벌였던 계엄군 비밀공작팀 소속 군인을 말한다. 당시 서석고 3학년생 오일교씨는 편의대원에게 붙잡혀 20일 동안 구금됐다고 증언했다.

광주 서석고 5회 졸업생인 장식 광주 첨단중 교사가 5ㆍ18 당시 참상을 소상히 기록한 일기장. 8번을 이사하면서도 39년째 보관해왔다. 심미안 제공
광주 서석고 5회 졸업생인 장식 광주 첨단중 교사가 5ㆍ18 당시 참상을 소상히 기록한 일기장. 8번을 이사하면서도 39년째 보관해왔다. 심미안 제공

서석고 5회 동창생들과 녹두서점 가족들은 “5ㆍ18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진상규명이 마무리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5ㆍ18, 우리들의…’ 출판준비위원인 서석고 5회 졸업생 방창석씨는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지금까지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 보니 5ㆍ18을 왜곡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임영상씨 역시 5ㆍ18을 왜곡하는 정치세력들을 비판하며 “5ㆍ18을 겪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5ㆍ18을 함부로 말하게 둬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다수의 기억이 모여 다져진다면 그 기억의 뿌리는 절대 뽑히지 않으리라.” 서석고 5회 졸업생 김옥철씨가 책에 “5ㆍ18 항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책무”라며 적은 다짐이다. 우리가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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