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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8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소비에트 상징 조형물을 폭파한 14세 여성 위르겐슨(왼쪽)과 15세 파벨.

소비에트 2차대전 전승기념일(5월 9일) 전야인 1946년 5월 8일 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n) 군인묘지의 전몰장병 추모탑이 폭파됐다. 꼭대기에 소비에트의 붉은 별이 얹힌 그 목조 조형물은 에스토니아 시민들에겐 압제의 상징이었다.

1944년 에스토니아를 장악한 러시아 소비에트는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희생자 추모비와 동상 등 기념 조형물들을 집요하게 파괴했다. 소비에트 입장에서 그것들은 낡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잔재였다. 폭파된 추모탑은 ‘해방자’를 자처하며 진주한 러시아 소비에트 점령군이 에스토니아 애국ㆍ민족주의 조형물을 대체해 만든 거였다.

폭파범은 여학교 친구인 14세 아일리 위르겐슨(Aili Juergenson, 1931~)과 15세의 아지다 파벨(Ageeda Paavel, 1930)이었다. 그들은 ‘숲의 형제들(Forest Brothers)’이라 불리던 항독ㆍ항소 파르티잔들로부터 폭발물을 구해 심야에 거사를 감행했다. 엄밀히 말하면, 당시 파르티잔 지도부가 미성년 여성인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훗날 정치인이 된 위르겐슨은 “우리의 동상들이 파괴된 자리에 놓인 러시아 약탈자들의 붉은 별을 언제까지나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쉽게 가솔린을 끼얹어 불 질러버릴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폭발음을 원했다”고 말했다. 파벨은 “거사 당일 현장 인근에는 경비병이 있었는데 다행히 어떤 여성과 시시덕대느라 우리를 보지 못했다. 그 여성은 우리와 무관했지만, 나중에 체포당했다”고 말했다.

전승기념일을 앞둔 시점이기도 해서 당시 언론 보도가 철저히 통제됐지만, 소문이 퍼져 이웃 도시 라크베레(Rakvere)와 타르투(Tartu)에서도 유사한 저항이 이어졌다. 범인 색출에 나선 지역 경찰과 KGB 전신인 MVD 요원들도 미성년 소녀들을 의심하지는 못했다. 위르겐슨 등은 파르티잔 부상병 치료를 위해 의사를 찾던 중 체포돼 취조 과정에서 범행 사실을 발각당했다. 둘은 우랄산맥 서쪽 굴라크 석탄광으로 추방돼 약 8년간 강제노동을 했고, 이후로도 사실상 추방 상태로 떠돌다 1970년에야 귀국했다.

1998년 2월, 위르겐슨과 파벨은 소비에트에 저항한 자유의 전사로서 에스토니아 정부의 ‘독수리십자훈장’을 받았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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