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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트랙’ 계기 우경화 치닫는 한국당
중도·합리 보수 외면받으면 총선 어려워
장외투쟁 접고 수권 정당의 길 고민해야
자유한국당 황교안(왼쪽)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무산되긴 했으나 자유한국당의 광화문 광장 천막 당사 설치 시도는 당의 안이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말았다. 광화문 광장이 어떤 곳인가. 이념, 계층, 세대를 초월한 시민들이 촛불집회로 국정농단 세력을 축출한, 민주주의의 상징적 공간이다. 물론 광장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의 한 축이었던 한국당은 권리 주장 이전에 촛불시민들 앞에서 먼저 자신들의 과오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것은 한국당과 이념적 대척점에 선 시민들 뿐만 아니라 한국당을 지지하고, 그래서 정권을 빼앗긴 상실감에 허우적대는 이들을 향해 ‘석고대죄’를 청하는 절차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지금껏 사과 한마디 한 적 없는 한국당이 광화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현 정부가 “독재”라며 “타도” 농성을 한다? 누가 봐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한국당이 지지세력의 비판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보수·진보 진영 공히 대안 정당, 정책 정당, 수권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보수 대개혁을 주문했지만 좌표를 잃고 우왕좌왕하며 시간만 허비했다. 리더십은 실종됐고, 당내 통합을 외치면서 계파 갈등으로 날을 지샜다. ‘보수 가치의 수호’를 공언했으나 무엇이 보수다운 가치인지 답을 찾지 못하고 겉돌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남북·국제 정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한 일이라곤 정부에 딴지를 거는 것뿐이었다. 집권세력의 국정운영을 견제·비판하는 것은 야당의 책무지만 한국당은 합리적 정책 대안 제시 없이 어깃장만 놓았다. 지지 여론이 높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막무가내로 반대만 했다. 선거제 개혁 논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거부하다 막판에 현실성 없는 안을 툭 던지는 걸로 끝냈다. 야당다운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못하니 ‘패스트트랙’ 유탄은 자업자득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당의 외연 확장을 강조해 온 한국당의 우경화 행보다. 촛불시민이 두려워 ‘태극기 부대’를 멀리 하더니 당대표 선출 과정에서 슬며시 ‘태극기 부대’에 기대다 이젠 아예 ‘태극기 부대’나 할 법한 원색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 전 정권과 다를 바 없는 ‘내로남불’식 인사, 야당에 대한 배려와 소통 부족 등을 지적·비판하는 일은 야당으로서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파 적폐’니 ‘김정은 같은 독재자’니 극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지지세력 결집 차원이라 해도 너무 나간 것이다. 민주정의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어진 보수 정당의 명맥을 계승한 정당에 어울리지도 않는데다, 한국당을 주시하는 합리적 중도 보수층의 눈살만 찌푸리게 하는 행태다. 한마디로 한국당은 수권 정당을 위한 당의 외연 확장엔 관심도 전략도 없고, 그러다 보니 대여 공세가 1차원적이고 근시안적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새누리당 시절 대선을 준비하면서 ‘좌클릭’을 서슴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경제정의와 분배를 강조해온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영입해 각종 ‘경제민주화’ 정책을 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 전 대통령은 복지국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및 고용 중시 등을 언급해 보수 진영에 충격을 주었다. 적어도 중도 세력을 끌어안아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지만, 어쨌든 그 전략은 먹혔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한국당의 미래와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빨간 점퍼를 입고 레드 카펫 위를 걸으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투쟁’ 구호를 외치며 ‘투사’ 코스프레를 한다고 한국당이 수권 정당이 되고 보수 혁신의 구심이 되는 게 아니다. 멀게는 대선, 가깝게는 총선에서 승리를 원한다면 패스트트랙 이후 정국 상황에서 정부·여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국민 지지를 얻고 당의 외연 확장을 이룰 수 있는지 진지하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국당은 보수 궤멸의 뼈아픈 고통을 또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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