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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쉬르 타파(1966~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테이쉬르 타파는 로스쿨을 졸업한 20대 시절부터 52년을 살고 세상을 뜨기까지 근 30년 동안 중동과 아시아 전쟁-내전의 전장에서 여성들이 겪은 집단 강간 등 성폭력 피해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고발한 네팔 출신 인권운동가다. 그 일을 통해 그는 전시 성폭력이 전쟁의 가장 야비한 무기이며, 전쟁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반 인륜 전쟁범죄라는 사실을 21세기 인류가 깨닫고 인정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hrw.org, Rita Thapa

유고 내전(1991~2001)은 20세기의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 중 하나다. 인류는 저 전쟁을 겪으며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라는, 무심하고 끔찍한 낱말 하나를 배웠다. 그리고, 전시 성폭력이 전쟁의 부수적 피해(Collateral Effect)가 아니라 비열하고도 적극적인 전쟁 수단이라는 사실을 재판을 통해 비로소 인정하게 됐다.

소비에트 해체와 유고슬라비아 연방 분열의 저 내전 중에서도 초기 보스니아 전쟁(1992~95)의 양상은 최악이었다. 민병대를 앞세운 세르비아(정교회)의 도발로 시작된 크로아티아계(가톨릭)와 보스니아계(이슬람)의 3파전은 외형상 대(對) 세르비아 전쟁 양상으로 전개됐지만, 크로아티아의 보스니아 무슬림계 학살까지 겹쳐 전황은 훨씬 복잡했다. 정복 전쟁의 형태로 타민족ㆍ인종을 비인간화하는 행위는 기원 전부터 이어져왔고 가까이 2차 대전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있었지만, 보스니아 전쟁의 도살자들에겐 제복도 지휘명령의 계통도, 최소한의 전쟁 규율도 사실상 없었다. 그들이 따른 건 오직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명령 혹은 충동이었다. 세계는 그 현장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오지가 아닌 유럽이어서 더 주목했다.

전시 성폭력을 전쟁 범죄의 독자적 항목으로 처음 심판한 게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였다. 그 전까지 전시 성폭력은,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듯 전쟁의 부수적 피해일 뿐이었고, 심판을 하더라도 고문의 한 형태 혹은 강제 노동(Slave-Labor)의 일부로서 심판했다. 2001년 2월 전범재판부는 전시 강간을 비롯한 ‘성 노예화(Sexual Enslavement)’를 가장 악랄한 형태의 반 인류 범죄의 하나이자 적극적이고도 비열한 전쟁 무기 혹은 수단임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역사령관 등 세 명에 대해 전시 성폭력 죄목으로 징역 28~12년 형을 선고하는 등 재판 기간 중 총 8명을 기소해 실형을 선고했다.

그 재판과 선고가 가능했던 건 법정 증언대에 선 세르비아 국경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 작은 도시 포차(Foca)의 피해여성 16명의 증언 덕이었다. 그들은 커튼 뒤 증언대에 차례로 나와 변조된 목소리로 자신들이 겪은 일을 폭로했다. 피해자는 물론 훨씬 많았지만, 대부분 가족과 무슬림 공동체의 2차 가해를 우려해 피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증언을 거부했고, 외부 접촉을 기피했다. 증인들은 그 위험을 무릅쓰고 전범재판 검찰 측 조사요원들의 요청에 응한 극소수였다. 당시 검사였던 미 법무부 소속 변호사 페기 쿠오(Peggy Kuo)는 “그 여성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웠을지 안쓰러워하는 이들에게, 나는 늘 거꾸로 이렇게 말한다. 가해자들은 그들에게 수치를 가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빼앗고자 했지만, 재판정에서 증언한 그들은 끝내 그 존엄을 지켜낸 이들이라고. (…) 물론 그들은 희생자지만 동시에 가장 강한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생존했다라고.”

로스쿨을 갓 졸업한 네팔 출신의 20대 예비 법조인 테이쉬르 타파(Tejshree Thapa)는 일반적인 직업 경로와 달리 저 재판을 위한 유엔 전시 대여성범죄 특별조사요원(Special Rapporteur)으로 이력을 시작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여성 피해자들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 대화하며, 증거 및 증언(증인)을 확보하고 기소에 필요한 혐의를 확정하는 거였다.

전시 집단강간을 비롯한 성폭력 피해 사례는 글로 된 자료를 읽는 것만으로도 물리적 고통을 느끼게 할 만큼 참혹할 때가 많다. 피해 당사자들에게 댈 건 아니겠지만, 그들의 증언을 일삼아 듣고 기록하는 것도 정서적ㆍ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 범죄는 법적 처벌과 피해 보상 등 합당한 조치를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진실은 일부나마 인정받았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인권옹호국장(advocacy director) 존 시프턴(John Sifton)은 훗날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전시 강간과 성 노예화가 가장 잔인한 반 인륜범죄로 인정되도록 한 것은 테이쉬르와 그가 만난 포차의 증인들 덕”이라고 말했다. 테이쉬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모두 그들(증인들)이 해낸 거였다. 내게 그들은 영웅이다. 그들의 투지, 악마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과감히 맞섰던 그 용기에 나는 늘 경외감을 느낀다.” (책 ‘Prosecuting Conflict-Related Sexual Violence at the ICTY)’)

어떤 일에든 세상이 주목하는 도드라진 소수의 주변에는 거의 늘, 보이지 않게 헌신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테이쉬르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유고내전 재판 직후인 2004년 HRW로 일터를 옮겨, 스리랑카 타밀반군 내전, 네팔의 마오주의자 반군 내전, 근년의 미얀마 로힝야 탄압ㆍ인종청소 사태까지, 아시아 내전ㆍ무력 충돌 지역을 누비며 여성들의 전쟁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가능한 한 그들을 돕고, 그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로 생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직함도 무슨 단체나 지부의 장이 아닌 HRW 남아시아 선임조사원이었다. 네팔 출신의 ‘무명’ 인권운동가 테이쉬르 타파가 복합장기부전으로 3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52세.

유고전범재판은 전시성폭력을 전쟁범죄로 심판한 첫 사례지만, 피해 당사자에겐 심판의 범위 등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조치일 뿐이었다. 더 많은 범죄자들이 기소돼 처벌받아야 한다는 무슬림 여성들의 요구는 대체로 묵살됐다. 사진은 2012년 사라예보 유엔 사무소 앞에서 실종자 명단을 들고 벌인 시위 모습이다. AP 연합뉴스

테이쉬르 파타는 네팔 중앙은행인 라스트라뱅크(Rastra Bank)의 은행장이던 베헤시 바하두르 타파(Bhekh Bahadur Thapa, 1937~)와 존스홉킨스 의대 출신 보건 전문가이자 여성 인권운동가 리타(Rita) 타파의 1남 2녀 중 둘째로, 1966년 11월 10일 태어났다. 베헤시 타파는 왕자가 왕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기도 했던 그야말로 격동의 네팔 현대사를 관통하며, 즉 정권의 대를 이어 재무 장관과 인도-미국 대사, 외무장관(2004~2005) 등을 역임한 미국 유학파 관료였다. 테이쉬르는 10대 때인 70년대 중반 캐나다 국제개발연구센터(IDRC)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했고, 79년 아버지가 미국 대사에 임명되면서 수도 워싱턴D.C에 정착, 매사추세츠 사립여대 웰즐리대(철학)를 거쳐 1993년 코넬대 로스쿨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3년 먼저 난 오빠 바스카르(Bhaskar, 2013년 별세)는 샌프란시스코의 몇몇 간선도로 완공 패널에 이름을 남긴 UC버클리 출신의 실력 있는 터널공학 기술자였고,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2년 아래 동생(Manjushree)은 몇 권의 소설과 논픽션을 출간, 오빠와 함께 영문 위키피디아에 한 자리를 차지한 꽤 알려진 페미니스트 작가다.

다시 말해 그의 가문은 왕정국가 네팔 최상의 특권계층이었고, 테이쉬르는 무척 풍요로운 환경에서 유-청년기를 보냈다. 특히 그에겐 1960년대의 네팔에서 낙태를 포함한 여성 출산선택권 운동을 전개한 어머니가 있었다. 네팔 형법은 1963년부터 20세 미만 여성 조혼(早婚)을 불법화했지만, 2016년 기준 18세 미만 여성 37%가 기혼이고, 15세 미만 기혼 여성도 10%에 이른다. ‘차우파디(Chaupadi)’라 불리는 생리 여성 격리 풍습도, 당연히 불법이지만, 관습이 법 위에 있는 네팔 중부와 중서부 지역서는 95%가 저 악습을 유지하고 있다. 어머니 리타가 의사 일을 접고 여성 보건ㆍ인권운동가가 된 건 출산 중 산모가 숨지는 것을 본 뒤부터였다고 한다. 2018년 6월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가 낙태를 합법화한 직후 자신의 아일랜드 국적 외동딸과 네팔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엮어 쓴 에세이에서, 테이쉬르는 어머니의 그 선택이 딸들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썼다.

테이쉬르가 전쟁터의 여성들 곁에 서게 된 구체적 계기는 분명치 않다. 그는 단 한 번도 긴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그럴 만한 지위에 있었거나 그런 계기의 중심에 선 적도 없었다. 다만 그의 조국 네팔을 비롯, 오래된 아시아 국가들의 여성 인권과 청소년기 이후 경험한 북미와 유럽 현실의 괴리가 그로선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지난 해 9월 네팔 영자신문 카트만두포스트에 기고한 ‘우리에게 남겨진 것 What Was Left Behind’란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웰즐리대 신입생 시절 한 성폭력 관련 모임에 참석했다가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은 손을 들어보라는 사회자의 말에 어찌나 많은 이들이 손을 드는지 보고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인 공포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는 그 공포의 가장 극단적인 현장을, 보스니아와 스리랑카, 미얀마 로힝야 난민캠프와 네팔 내전의 전장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생각들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과 함께 국제인권단체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HRW의 방대한 인권실태보고서 숫자와 사례들 속에 스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끈 HRW 현지 조사팀은 타밀 반군(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의 소년병 강제징집 실태를 세상에 처음 알렸고, 네팔 내전기 정부군과 마오이스트 반군 모두가 자행한 광범위한 인권유린과 여성 대상 범죄 실태를 담은 사실상 첫 보고서로 미국의 네팔 군사원조 중단 등 국제적 압력을 이끌어냈다. 미얀마 로힝야 사태 당시 방글라데시-미얀마 국경 난민캠프의 실상을 현지 조사를 통해 처음 알린 이들 중 한 명도 그였다.

스리랑카 내전은 26년을 끌면서 10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그 중 약 4만 명은 내전 막바지인 2009년의 약 5개월 사이에 숨졌다. 2012년 외신들이 폭로한 유엔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유엔 본부는 그런 사태가 예견되던 상태에서 다수 현지 민간인들의 요청을 묵살한 채 요원 전원 철수를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타밀 반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 민간인들이 인간방패로 희생되는 사태를 사실상 방조ㆍ묵인했다. 유엔보고서의 결론은 “국제법과 심각한 인권 침해 및 위험에 처한 시민 보호에 따르는 유엔의 책임” 에 대한 ‘총체적 실패 systemic failure’였다. BBC는 저 보고서를 보도하며, 당시 유엔의 일부 현장 요원들과 인권 NGO 회원들이 느낀 절망과 열패감을 함께 소개했다. 테이쉬르의 HRW 보고서는 유엔 보고서의 기초자료이자, 저 결론의 구체적인 근거였다. 보고서에서 테이쉬르(와 조사원들은) “당시 유엔의 다수 상급 관료들에게는 현지 민간인들의 학살을 방지하는 일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nyt, 2019.3.29)고 썼다. 반기문 사무총장 체제의 유엔은 저 파동 직후, 인권과 민간인 생명 보호를 활동의 최우선 과제로 상정한 사무총장 직속 ‘Human Rights up Front’라는 조직을 꾸렸다.

테이쉬르 타파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 프로필 사진을 아일랜드인 첫 남편과 낳은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썼다. 그는 행정가 겸 보건인권활동가인 어머니가 네팔에서 1960년대부터 여성 낙태권 옹호운동을 벌였던 사실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tejshreethapa

네팔 정부와 마오이스트 당(CPN-M) 게릴라 간의 장기 내전(1996~2006)과 인권 침해는 테이쉬르로선 특히 힘들었을 것이다. 현장이 그의 조국이었고, 범죄의 주요 당사자가, 물론 자율적ㆍ독자적 권한을 지닌 군(軍)이 자행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관료로 있던 정부의 범죄였다. HRW의 네팔 보고서, 특히 여성 성폭력 피해 보고서는 그와 그의 팀이 수집한 사례 및 피해자 증언들로 고통스러우리만치 가차없었다. 마오이스트 진영의 강간 및 집단강간 사례도 없지 않았으나 90% 이상의 압도적 다수가 정부 보안군(경찰, 전투경찰 포함)에 의해 자행된 범죄였고, 그 때문에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신고도 못한 채 상시적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돈까지 빼앗겨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던 여성들의 사례들, 강간 이후 남편으로부터 겪은 상습 가정폭력, 사실상 전무한 심리-사회적 강간 피해 보상 지원 실태…. 2014년 보고서는 “내전은 끝났지만, 지속되는 불의 속에 전쟁의 폭력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거였다.(hrw.org) 강간 피해자는 35일 이내에 고소해야 한다는 규정했던 네팔 형법은 고소 시한을 2012년 이후 6개월로 연장했고, 근년의 신형법으로 1년으로 늘렸다. 하지만 내전 성폭력 피해는 그렇게, 고소 기회마저 법으로 박탈됐다. Hrw는 테이쉬르가

조사원이기 이전에 변호사로서 현장 인권 운동가와 저널리스트 및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헌신했고, 도움이 필요한 이라면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연락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공개해두고 지냈다고 전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군부의 위협을 받던 여러 성 소수자 활동가와 블로거들이 그의 도움으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 마오 반군에 의해 강제징집됐다가 부상 당한 채 정부군의 포로로 붙잡힌 한 네팔 소녀의 성적 학대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인맥을 동원해 개입한 일도 있었다.

때와 장소만 다를 뿐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여성 전시 성범죄 피해실태를 수십 년간 조사하고 보고서를 쓴 탓에 어떤 구절은 잠꼬대로도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지만, 그에게 인권은 유엔인권헌장의 아득한 추상이 아니라 항상 사적인(Personal)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피해자 개개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알았고, 흘린 눈물과 감춘 눈물의 의미를 알고자 했고, 그 진실을 보고서에 담고자 노력했다는 의미였다. 생전의 그는 “희생자와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정치인들이 더 이상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 결혼-이혼 했고, 딸 하나를 두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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