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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회> 신필름 제국의 등장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최은희 주연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왼쪽)과 김지미 주연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 포스터. 1961년 1월 열흘 간격으로 개봉한 두 영화는 배우 감독 부부의 맞대결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61년 벽두 충무로는 ‘춘향전’으로 전운이 감돌았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1961)이 구정(설날)을 앞두고 불과 열흘 간격으로 개봉하면서 극장가에서 정면으로 격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하야카와 고슈가 만든 ‘춘향전’(1923)부터 시작해 ‘춘향전’은 한국영화계의 인기 있는 단골소재였다. 해방과 전쟁 이후에는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 12만 관객을 동원하며 저력을 입증했고, 연이어 김향의 ‘대춘향전’(1957), 안종화의 ‘춘향전’(1958)이 만들어져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그 무렵 ‘춘향전’은 손을 댔다 하면 돈을 쓸어 담는 충무로의 검증된 흥행 코드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작에 기반을 두고서, 저마다 사운(社運)을 건 대작 두 편이 같은 시기에 승부를 겨루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두 부부의 벼랑 끝 싸움 

신상옥과 홍성기는 ‘자유만세’(1946), ‘죄 없는 죄인’(1947)을 만든 최인규 감독의 문하에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하며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데뷔는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 ‘여성일기’(1949)로 홍성기가 빨랐고, ‘열애’(1955)를 흥행시키면서 멜로 영화에 일가견이 있다는 정평이 일찌감치 나있었다. 입봉이 늦었고 한동안 흥행작을 내지 못했던 신상옥은 그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공교롭게도 춘향 역에 각기 캐스팅된 김지미와 최은희는 두 감독의 배우자이기도 했으니, ‘춘향전’을 둘러싼 이 전쟁은 두 감독의 자존심, 두 배우의 명예를 건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신상옥의 제작사 신필름의 영화제작 신고가 수리된 직후에 홍성기의 선민영화사가 ‘춘향전’의 제작을 신고하면서 본격적인 ‘춘향전’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별아 내 가슴에’(1958), ‘산 넘어 바다 건너’(1958) 등 다수의 흥행작을 배출한 선민영화사에다 국제극장까지 보유하고 있었던 홍성기의 ‘춘향전’이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신필름에서 일하던 제작자 박운삼이 홍성기 측에 붙으면서 대세는 ‘춘향전’ 쪽으로 더 기울었다. 반면 신생영화사 신필름의 사정은 화급했다. ‘로맨스 빠빠’(1960)의 성공과 다른 영화사의 제작 대행으로 거둔 수익금이 ‘성춘향’의 종자돈 노릇을 했지만, 그럼에도 제작비가 모자라 당장의 밥값을 위해 전당포 신세를 지는가 하면, 소품과 의상을 일일이 자체제작으로 충당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처지였다.

더군다나 제작 일정까지도 ‘춘향전’에 뒤지고 있었다. 벌어지는 격차를 좁히기 위해 신필름의 기술고문 이형표가 라이벌인 선민영화사 측을 관계 당국에 고발하는 꼼수까지 동원했을 정도였다. 컬러필름을 구하기 힘들었던 한국영화계에는 부족한 필름분을 저가에 밀수로 암암리에 들여오고 있었는데, 예외적으로 코닥사의 정품 필름을 쓰고 있던 신필름은 이 점을 이용해 선민영화사 측을 방해했던 것이다. 정정당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이나 신필름 측은 다급했고 ‘성춘향’의 성패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충무로에서는 “홍춘향과 신춘향의 피 묻은 대결”이라는 말이 나돌았고, 언론에서는 양자간의 경쟁을 가십거리 삼아 기사를 쏟아냈다. 그 중에는 약관 21세의 김지미와 35세 최은희의 나이 차이를 트집 잡아 최은희가 춘향을 하기엔 너무 늙은 건 아니냐는 악의적인 보도가 나돌기도 했다.

영화 '성춘향'에서 춘향을 연기한 최은희. 당시 35세로 춘향역을 맡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춘향전'에서 춘향역을 맡은 배우 김지미(오른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뚝심 연출로 역전극 시도한 신상옥 

신상옥은 뚝심 있는 연출가였다. 일정은 촉박하고 예산은 빠듯한 상황에서도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광량이 부족하면 색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점을 염려해 오후 3시 이후에는 촬영을 접는가 하면, 필름을 일본의 현상소에서 현상하는 등 영화를 최선의 상태로 내놓기 위해 온갖 정성을 마다하지 않았다. 작품의 완성도야말로 ‘성춘향’과 ‘춘향전’의 희비를 가를 승부수가 될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그리고 이 판단은 옳았다. 1월 18일 홍성기의 ‘춘향전’이 국제극장에서 앞질러 개봉했지만,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성춘향’이 도리어 ‘춘향전’을 압살했던 것이다. 부실한 세트, 어둡고 칙칙한 색감, 원전에서 달라진 게 없는 평면적인 서사, 김지미 외에는 인지도 낮은 배우들로 채운 부실한 캐스팅 등 졸속으로 만들어진 흔적을 곳곳에 노출하며 ‘춘향전’은 금방 잊혀진 반면, ‘성춘향’은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컬러 시네마스코프를 도입한 기술적 성취와 더불어 김진규, 허장강, 도금봉, 배삼룡 등의 탄탄한 배역진, 현대적인 재해석(“제일 크게 생각하는 수확은 고무신 에피소드다. 원전 ‘춘향전’의 맹점이 뭐냐면, 춘향이랑 이도령이 한번도 만나지 않고 좋아하는 거다. 가까이 안 보고 예쁜지 안 예쁜지 어떻게 아나? 그걸 해결한 게 ‘성춘향’의 수확이다” 신상옥 감독의 말이다.)이 곁들여져 관객의 흥미를 한껏 돋우었던 것이다.

명보극장에서 단관 상영한 영화는 몰려드는 관객을 감당하지 못해 2개관에서 동시 상영하며 흥행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에서 한국영화를 트는 상영관이 고작 3개관이던 시절이었다. 지방 흥행업자에게 판권을 팔지 못했던 위기는 전화위복이 되어, 직접 영화를 배급하면서 번 수입이 판권을 팔아 얻는 돈보다 몇 배는 넘었다고 한다. ‘성춘향’은 단관개봉으로만 서울관객 36만명을 기록했고, 영화가 거둔 수익금은 당시 돈으로 대략 3억환 정도로 추산되었다. 표값으로 받은 지폐를 일일이 정산하지 않고 마대자루에 쓸어 담아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신상옥 최은희 커플은 영화계 주류로 떠오른 반면 홍성기 김지미 부부는 불행의 터널로 들어갔다. 거듭되는 흥행 실패와 갈등을 겪으며 홍성기 김지미 커플은 남남이 됐다.

1970년 4월 경복궁을 찾은 배우 김지미. 1960~70년대를 관통하는 최고의 미녀 배우로 손꼽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성춘향'의 최은희.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도 월급제… 충무로 영화제국의 위용 

‘성춘향’이 거둔 대성공은 신상옥의 야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의 꿈은 평범한 영화감독이나 제작자의 수준을 넘어선 곳에 있었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에 버금갈 한국형 영화기업, 자신만의 영화 제국을 갖길 원했던 것이다. ‘성춘향’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는 고스란히 신필름의 규모를 확장하고 영화제작의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투입되었다. 그해 9월 ‘연산군’(1961)을 마치고 ‘폭군 연산’(1962)에 들어갈 즈음, 신필름은 서울 원효로 촬영소의 건설을 마치고 을지로에 있던 본사까지 이전시킨다.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소유였던 용산구 문배동의 건물과 부지에 설립된 원효로 촬영소는 총평수 1,018평(약 3,339㎡)에 두 개의 스튜디오와 녹음실, 영사실, 연기실, 소품실, 사무실 등 필요한 걸 모두 갖춘 신필름의 기반이었다. 전속 계약으로 감독과 연기진을 모아 전직원 월급제를 운영하고, 지방 도시 개봉을 위한 다섯 개의 지사를 산하에 두는 등 영화기업 신필름은 착실히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1962년 일정 규모의 시설과 장비, 인력 등 규정한 등록조건을 충족시킨 영화사에만 허가를 내주는 박정희 정권의 영화법 시행령은 산업적 양산체제를 구축한 신필름에 더없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신필름은 승승장구하며 1964년까지 상승 기세를 이어갔다. ‘열녀문’(1962), ‘와룡선생 상경기’(1962), ‘로맨스 그레이’(1963), ‘쌀’(1963), ‘빨간 마후라’(1964) 등 신필름 전성기의 작품들은 상업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 1965년의 대종상 시상식에선 ‘벙어리 삼룡’과 ‘빨간 마후라’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가 극영화 14개 부문 중 11개 부문을 휩쓸었고, 그보다 앞선 1962년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가 최우수 작품상, ‘상록수’(1961)가 남우주연상과 조연상, ‘연산군’이 미술상을 석권하며 한국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이때 신상옥이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사장 런런쇼를 만난 인연은 ‘달기’(1964)부터 ‘마적’(1967)까지 일곱 편을 함께하며 한홍 합작영화의 맥을 잇는 계기가 된다.

1966년 김종필과의 친분으로 지원을 받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면서 신필름의 양산체제는 정점에 달한다. 그러나 규모가 커진 만큼 늘어난 유지비와 수익성 악화, 과다한 제작편수로 인한 작품의 질적 하락과 재정적 부담은 민간 영화사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신상옥의 영화가 예전의 연출력과 대중성을 잃고 과거작의 리메이크로 기울어간 것도 신필름의 쇠락에 일조했다. ‘빨간 마후라’ 때 500만원이라는 과도한 제작비로 인해 부도를 맞았다가 대만 판권료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바 있었던 신필름은 부도를 밥 먹 듯하며 197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파경, 정권과의 관계 악화, 정부의 검열과 경영 간섭 등 총체적 난국을 맞아 1975년 11월 영화사 등록을 취소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국의 할리우드를 꿈꾸었던 영화 제국의 몰락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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