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봐줄게요” 치매 노인과 위장결혼한 뒤 60억 빼돌리다

입력
2019.04.30 04:40
수정
2019.04.30 07:25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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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6> 치매 자산가 ‘사기 결혼’ 사건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지능범죄 시리즈는 매주 화요일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주범 이모씨가 만든 가짜 명함. 이름, 주소, 전화번호, 직함 등 여기 적힌 정보는 모두 가짜다.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제공
주범 이모씨가 만든 가짜 명함. 이름, 주소, 전화번호, 직함 등 여기 적힌 정보는 모두 가짜다.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제공

“나를 반평생 돌봐 준 이XX씨에게 사후에 전 재산을 양도하기로 한다. 이에 자식, 형제 포함 어느 누구도 이유(‘이의’의 오타인 듯)를 제기할 수 없다. 이 일을 정확히 하기 위하여 공증하기로 하고 각각 한 통씩 보관하기로 한다.”

2013년 10월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80세 노인 A씨가 작성한 자필 유언장 내용이다. ‘반 평생 은인’ 이모(65)씨가 정말 고마웠던 모양이다. 자식과 형제도 아닌, 제3자에 전 재산을 주겠다니 말이다. A씨는 서울과 경기 광주 등에 있는 땅도 이씨에게 양도한다는 증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이씨가 “친부모와도 같이 돌봐 준 은혜에 보답하고 생애를 다하고 하나님에게 가는 날까지 돌봐주기로 하고, 또한 외롭고 소외된 노인들을 돌봐주며 좋은 일에 사용하기로” 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이씨는 정말 A씨의 반평생, 40여년 정도를 A씨 곁에서 보내긴 했을까. 유언장과 토지양도증서를 꼼꼼히 보면 묘한 점이 하나 보인다. 유언장에선 이씨가 “반평생을 돌봐준 은인”이라더니 토지양도증서에선 “10여년간 성심 성의를 다해 돌봤다”고 적혀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A씨가 치매환자라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을 뿐이어서다. 받아 적으라 불러 준 사람은, 상속받게 될 이씨였다. 이씨는 ‘작전 성공’에 긴장하고 흥분한 나머지, 이 미세한 차이를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3개월만에 치매 노인의 ‘반평생 동반자’가 되다 

뛰어난 머리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던 A씨는 90억원대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A씨가 늙으며 치매 증상이 나타나더니 70대 들어선 ‘국정원이 감시하고 있다’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등 망상 증세까지 보였다. 2013년 초 뇌종양 수술을 받은 뒤엔 치매증상이 더 악화됐고 대소변도 가리기 힘들어 했다. 더 결정적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고립된 A씨는 재산 일부를 법적 다툼으로 빼앗기기도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치매 자산가 사기결혼 사건 일지. 송정근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치매 자산가 사기결혼 사건 일지. 송정근기자

2013년 7월쯤 이씨는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취약해진 A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처음엔 “대법원 판결을 뒤집어 주겠다”고 했다. 자신을 ‘삼대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이자 ‘평화병원의료재단’ 이사장이라 소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친구’라고도 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누군가 내 재산을 앗아갈 지 모른다 두려워했던 A씨는 그 말에 넘어갔다. 이씨 말을 잘 따르면 재산도 지키고 여생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씨는 7월 이후 불과 석 달만에 A씨가 자신을 ‘반평생 은인’이라 부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주범 이씨가 허위로 발급 받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서울중앙노회 목사안수증.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제공
주범 이씨가 허위로 발급 받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서울중앙노회 목사안수증.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제공

유언장과 토지양도증서 작성은 출발점에 불과했다. 이씨는 재빨리 A씨 재산 처분에 나섰다. 유언장 작성 한 달 뒤엔 A씨를 데리고 미국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2억 5,000만원짜리 A씨 펀드를 해지하고 그 대금을 받아 가로 챘다. 일주일 후엔 서울 종로구의 A씨 집을 4억 4,000만원에 팔았다. 소송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둘러댔다. 나중에 경찰이 확인한 바로는 2013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이씨가 이런 식으로 팔아 넘기고 담보 대출 받아 처분한 금액만 62억 727만원에 이르렀다. 빨리 팔아 치워야 하니 시세보다 20~30% 손해를 봐도 개의치 않았다.

 

 ◇’친족상도례’ 노리고 위장결혼까지 … 대담해진 범행 

이씨는 A씨 감시에 힘썼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 연락이 닿지 않도록 해야 했다. A씨 집을 팔아버린 뒤론 1년 동안 A씨 거처를 네 번 옮겼다. 휴대폰 번호도 다섯 차례 바꿨다. 집 밖으로 나갈 땐 A씨를 차에 태워 다니며 감시했고 “집 밖으로 나가면 경찰이 잡아간다”고 세뇌하기도 했다.

이씨는 한걸음 더 나아가 A씨와 결혼을 결심했다. 형법상 ‘친족상도례’ 조항을 노렸다. 친족간 사기ㆍ횡령 등 재산 범죄에 대한 처벌은 면제하는 조항이다. 집안 싸움에까지 국가 공권력이 개입할 순 없으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취지에서 만든 조항이다. 바꿔 말해 이씨와 A씨가 ‘법적 부부’라면, 더 안심하고 재산을 빼돌릴 수 있다는 얘기다.

유언장을 작성한 지 석 달만인 2014년 1월, 이씨는 서울 종로구청에다 A씨와 혼인신고서를 냈다. 혼인신고서엔 신랑, 신부 양측 증인이 1명씩 서명한다. 이씨가 제출한 혼인신고서에 서명한 증인은 이씨와 내연관계인 또 다른 이모(2016년 사망ㆍ당시 77세)씨, 그리고 이씨와 채무관계로 얽혀 있던 오모(66)씨였다.

[저작권 한국일보] 사기 결혼 범행 개요. 송정근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사기 결혼 범행 개요. 송정근기자

혼인신고 이후 이씨의 범행은 더 대담해졌다. 충북, 경기, 서울 일대 A씨 땅을 막 팔기 시작했다. A씨 명의로만 된 땅뿐 아니라, 친족도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어 매각 사실을 금세 들통날 땅까지도 팔았다. 이 과정에서 A씨는 들러리였을 뿐, 전권을 행사한 건 이씨였다. 시세보다 2,000만원 싸게 A씨 땅을 사들인 B씨는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 “거래 과정에서 A씨는 그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 하지 않았고, 필체는 초등학생 같았다”고 진술했다.

 ◇제기동에서 시작한 사기커플 … 의료인 행세까지 

이씨와 내연관계에 있는 또 다른 이씨는 2000년대 초 서울 동대문구 약령시장에서 침술사와 한약 판매상으로 일하며 알게 됐다. 시장 한 귀퉁이에서 ‘삼대한의원’이란 간판을 달고 지냈다. 물론 자격증 같은 건 전혀 없는 유령 사무실이었다.

이씨 커플의 무기는 ‘대담함’이었다. 2010년엔 경영위기를 겪고 있던 서울 영등포구 C병원에 가서 “미국 평화병원의료재단이 통일을 대비해 파주와 서울에 병원을 세우려 한다”며 거액 투자를 조건으로 방 1개를 받아 ‘이사장실’ 간판을 내걸기도 했다. 그곳 사무실에서 ‘이사장님’은 주로 병원에 온 환자들에게 약을 팔거나, 산업재해를 인정받게 돕겠다며 돈을 뜯어내는 일을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위장결혼 사기 주범 이씨가 내세운 가짜 신분. 송정근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위장결혼 사기 주범 이씨가 내세운 가짜 신분. 송정근기자

A씨 사건에서도 위기는 있었다. 이씨가 A씨 재산을 한창 처분하고 다니던 2013년 12월, A씨 동창을 우연히 만나게 됐다. 이씨는 “한의사이자 A씨의 주치의”라 자신을 소개했지만, 동창 눈에는 수상쩍었다. “한의사라면 어느 대학에서 무슨 전공을 했느냐”는 식으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자 이씨는 “정식 면허는 없고, 그냥 한의원 몇 군데 하는 정도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동창은 A씨에게 따로 연락해 “위험해 보이니 이씨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게 마지막 탈출 기회였다. A씨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혼 뒤 미국 도피를 꿈꾸다 

결혼 7개월만인 2014년 8월, 이씨는 이혼을 추진했다. 급히 처분할 만한 A씨 재산을 다 처분했거니와, 급히 처분하는 과정에서 나온 세금 문제도 해결해야 해서다. 이씨는 A씨 재산을 처분할 때 거래 상대방에게 “세금 문제가 있으니 대금을 A씨가 아닌 내 통장으로 넣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중에 체납액을 정산해보니 체납 세금만 수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주범 이모씨의 이름이 적힌 미국 소재 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학위. 이씨가 약 2,200만원을 주고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제공
주범 이모씨의 이름이 적힌 미국 소재 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학위. 이씨가 약 2,200만원을 주고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제공

2014년 11월 이혼 조정안이 확정됐다. A씨가 이씨에게 위자료 1억원과 재산 10억원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혼 이후 이씨는 아마 미국 도피를 꿈꿨던 것 같다. 2014년 9월 강모(72)씨에게 약 2,200만원을 주고 미국 대학의 명예박사학위를 만들어달라 부탁하거나, 자기 아들을 미국 대학에 장기 체류시켜주면 1만달러를 주겠다 약속하기도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A씨 가족은 이씨를 고소하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족상도례’ 조항 때문에 수사가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결국 혼인무효 소송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2015년 10월 경기남부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가 수사에 착수, 이듬해 3월 이씨를 체포했다. 혼인 자체가 무효였다는 점을 집중 공략, 이씨는 2016년 9월 1심에서 6년형을, 2017년 3월 항소심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사기 관련 혐의는 물론, 허위로 혼인신고를 한 혐의 등도 모두 유죄로 인정받았다.

A씨는 이씨가 이혼소송을 진행할 당시에도 이씨 말만 믿고 있었다. “외출하면 경찰이 잡아간다”는 말에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이씨가 시켜주는 배달음식만 받아 먹었다. 2014년 10월 21일, 망상에 시달리던 A씨가 방을 나와 경비원을 찾으면서 비로소 경찰을 통해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A씨는 2016년 2월 숨졌다.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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