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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6>켄 리우 ‘제왕의 위엄’
상상의 섬 다라 제도의 일곱 나라를 표시한 지도. 황금가지 제공

상상의 섬 다라 제도. 이곳에는 오랫동안 티격태격해온 일곱 나라가 있었다. 틈만 나면 전쟁, 동맹, 배신 등을 일삼던 다라 제도의 혼란을 수습한 왕은 북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자나의 마피데레. 그는 천하통일의 과업을 완수하고 나서, 자신을 ‘시황제’라 일컬으며 철권통치로 새로운 나라를 지배한다.

하지만 시황제의 폭력에 기댄 통치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시황제가 죽고 나서 간신의 농간으로 추대된 2세 황제가 통치를 시작하자 제국은 아래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선대 황제의 묘지 조성 공사에 끌려가던 일꾼 가운데 일부가 “왕, 후, 장, 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王侯將相 寧有種乎)”며 반기를 든 것이다.

제국 곳곳에서 반란의 기운이 꿈틀대는 와중에 신들의 응원을 받는 두 영웅이 등장한다. 평민 출신으로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청춘을 낭비하던 쿠니 가루.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명문 무가(武家) 출신이지만 시황제에 저항하다 집안이 몰락한 마타 진두. 반란의 중심에 선 이 두 영웅은 한때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친했지만, 결국 천하의 패권을 놓고서 경쟁한다.

미국 독자라면 ‘일리아드’와 (‘얼음과 불의 노래’가 원작인)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섞어 놓은 독특한 소설로 읽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왕좌의 게임’에서도 칠 왕조가 등장한다.) 하지만 동아시아 독자라면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맞다.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방(쿠니 가루)과 항우(마타 진두)의 이야기다.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가 펴낸 ‘제왕의 위엄’은 바로 ‘초한지’를 SF 판타지로 다시 쓴 소설이다. 그렇다고 ‘초한지’를 번안한 수준으로 지레 짐작해서는 곤란하다. 리우는 역사 속 유방과 항우의 그 숨 막히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때로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재탄생시켰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무기들. 전투연, 잠수함, 비행선. 민음사 제공

중국보다는 일본 열도를 연상시키는 ‘다라 제도’부터 ‘초한지’의 중원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 속 전투의 일부는 해전으로 바뀌었다. 검, 봉, 방패에 더해서 SF 소설답게 비행선과 잠수함이 등장한다. 실제로 있었던 장량(루안 지아)의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염두에 둔 소설 첫 부분의 황제 암살 시도에서는 전투기를 연상시키는 글라이더도 등장한다.

수많은 인물이 소설 속 캐릭터로 자리 잡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전율을 느낀 등장인물은 ‘대장군’ 한신(긴 마조티)이었다. 리우는 한신을 기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뒷골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젊은 여성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유방과 함께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성 장군을 상상해 보라.

제왕의 위엄 일본판 표지. 민음사 제공

지록위마(指鹿爲馬), 파부침주(破釜沈舟), 배수진(背水陣), 사면초가(四面楚歌), 토사구팽(兔死狗烹) 등 익숙한 사자성어의 고사가 색다른 이야기로 펼쳐지는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지휘관(쿠니 가루)이 여성을 비하하며 적을 모욕하는 부하에게 “세상의 반은 여성”이라고 역설하며 발끈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신선한가.

켄 리우는 ‘종이 동물원’으로 당대 SF 중단편 소설의 성취가 얼마나 뛰어난지 유감없이 보여준 SF 계의 신성이다. ‘제왕의 위엄’으로 리우는 자신이 얼마나 다재다능한 작가인지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 소설로 시작한 ‘민들레 왕조’ 시리즈는 3부작으로 계속된다고 하니 또 다음 책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장담컨대, ‘왕좌의 게임’ 같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것이다.)

제왕의 위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발행ㆍ489쪽ㆍ1만5,800원

‘제왕의 위엄’을 읽고서 진짜 유방과 항우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역사학자 공원국의 대작 ‘춘추전국 이야기’의 마지막 권(11권)도 보자. 리우만큼이나 재능 있는 이 역사학자는 실제 사료와 최신 연구에 기반을 두고 유방과 항우 이야기를 소설 뺨치게 정리해 두었다. 1970년대생 두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와 역사를 해석하는 안목을 비교하는 재미는 덤이다.

SF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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