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코미디언 대통령

입력
2019.04.24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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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신봉자들에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자칫 오만한 엘리트로만 여겨질지 모른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맞서 불굴의 지도력으로 영국을 이끌어 승리를 거둔 귀족 출신의 이 거물 보수정치가는 민주주의를 인정했지만, 그 약점과 위험에 대한 냉소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까지 시행돼온 모든 정치체제를 제외하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했다. 또 “민주주의에 대한 최상의 반론은 평범한 유권자와 단 5분만 대화해도 나타난다”며 대중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게 처칠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도 이미 그 한계와 위험을 통찰했다. 철학자 플라톤은 명저 ‘국가’에서 국가 운영을 배의 운항에 비유해 민주주의의 위험을 짚어냈다. 비유를 요즘식으로 풀면, 주권을 가진 국민은 배의 선주다. 하지만 선주는 눈과 귀가 어둡고 항해술도 모른다. 그래서 선원 중에서 좋은 항해사를 뽑으려 한다. 하지만 선원들은 오직 배의 키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과 선주를 감언이설로 속이는 일에만 골몰할 뿐, 정작 항해술엔 관심도 없다.

□ 결국 권모술수에만 능한 선원들이 키를 장악해 배 위의 모든 것을 먹고 마시면서 흥청망청 배를 몰아간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위험에 대한 오랜 우려가 근년 들어 더욱 뚜렷이 현실화하는 듯하다. 베네수엘라처럼 나라를 거덜 내고야 만 중남미형 좌파 포퓰리즘 정치는 이미 고질적 현상이지만, 일종의 우익 포퓰리스트인 도널드 트럼프가 ‘어쩌다 대통령’이 된 일은 미국 민주주의까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음을 드러낸 ‘선거 참사’로 여겨진다.

□ 최근 우크라이나 대선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번 대선에서 부패 혐의로 일그러진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에 압승해 대권을 거머쥐게 된 주인공은 코미디언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다. 지지세력은 물론, 정치 경력도 없는 그는 현지 TV 시리즈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역사교사를 하다 부패를 비판하는 동영상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되는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코미디 드라마지만, 현실 풍자로 인기를 얻으며 진짜 대통령이 된 셈이다. 오죽했으면 유권자들이 그에게 몰표를 줬겠느냐는 얘기도 있지만, 갈수록 희극화하는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느끼게 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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