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낙태죄 논의, 공동체적 지혜로 풀어야

입력
2019.04.23 04:40
31면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다음날인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헌재 결정에 대한 입장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다음날인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헌재 결정에 대한 입장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번 결정으로 문제가 정리되기보다는 오히려 진통과 혼란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환영과 비판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헌법재판소 정문 앞은 관련 단체들의 집회로 연일 소란스럽다. 급기야 한 산부인과 의사는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낙태수술을 거부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해당 청원의 참여 인원은 현재 3만명을 넘어섰다. 의료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한 의료인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앞으로 의료인이 양심이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낙태수술을 거부한다면 불법 진료 거부로 처벌할 수 있을까. 양심적 병역거부처럼 양심적 낙태 거부도 허용되어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입법정책 내지 사법적 판단에 맡겨질 문제지만 현재의 헌법 판례에 비추어 볼 때 낙태수술 거부는 당해 의사의 헌법상 기본권인 양심의 자유 내지 신앙의 자유의 영역으로 판단될 소지가 높다.

이와 관련해 낙태가 직접 문제된 케이스는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미국의 실제 사건이 있다. 2012년 콜로라도주에서 결혼을 앞둔 남성 동성애자들이 필립스라는 웨딩케이크 업자에게 결혼 축하 웨딩케이크 제작을 의뢰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필립스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기독교 신앙에 반한다는 이유로 웨딩케이크 제작을 거부하였고, 이에 대해 콜로라도주 인권위원회는 차별금지법 위반 행위라고 결정하였다. 결국 필립스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2018년 6월 미 연방대법원은 콜로라도주 인권위원회의 결정이 헌법상 보장된 필립스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였다며 필립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은 1973년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이 나온 이후 연방과 47개 주에서 소위 낙태거부법(abortion refusal law)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합법적 낙태라 하더라도 개인의 종교적, 윤리적 신념에 의해 낙태에 반대하는 의사, 의료기관은 낙태수술을 정당하게 거부할 수 있다. 연방법은 낙태수술 거부를 이유로 한 차별 처우를 금지하고 있고, 일부 주에서는 약사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피임약 판매도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 헌법은 임신한 여성의 선택권도 보장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을 중시하는 낙태 반대론자들의 양심과 신앙에 입각한 선택권도 똑같이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낙태 옹호론자들 사이에서는 법적으로는 낙태가 합법화됐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낙태거부법 등으로 인해 낙태 합법화의 실익은 크게 퇴색되고 있다는 비판이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

이번 헌법불합치 결정의 핵심 골자는 국가가 초기(初期) 임신상태의 낙태까지 형사처벌하여 출산을 강제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임신상태를 벗어나 태아의 생명권 보호가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더 중요하게 된 단계에서는 형사처벌을 비롯해 낙태에 대한 규제가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읽힌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넘어서는 안 될 경계선을 제시한 것일 뿐, 그 경계선의 범위 내에서 낙태의 허용 및 규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절차를 어떻게 정할지는 이제 국회의 몫이 되었다.

국회는 내년 연말까지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에 부합하는 새로운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 본격적인 논의는 지금부터다. 찬반론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만큼 입안 과정은 매우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칫하면 극단적인 대립으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상대편 주장도 귀담아 듣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그동안 제기된 어떠한 헌법적 이슈보다도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 고차방정식을 슬기롭게 풀 수 있는 공동체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김희관 변호사ㆍ전 법무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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