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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성 소피아 대성당, 이슬람 모스크 건축에 영감을 불어 넣다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매주 들려드립니다.  
성 소피아 사원의 외관. 모스크로 개조된 후 터키 모스크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

터키는 매년 방문객 3,000만명이 넘는 세계 10대 관광 대국 중 하나다. 특히 터키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곳보다 매력적이다. 이 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은 후 동양과 서양을 모두 지배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찾는 곳이 성 소피아 사원과 그 맞은편에 세워진 블루 모스크일 것이다. 성 소피아 사원은 원래 비잔티움 제국 시절에 그리스도교 대성당으로 지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원래 그리스도교 성당이었던 이 건축물이 터키 고유의 이슬람 모스크 건축 양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혼, 성(聖) 소피아 대성당

터키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은 과거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다. 330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에서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비잔티움 제국이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 동안이었다. 그는 수많은 정복 전쟁을 치르며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했다. 그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기도 했지만 건축에도 남달리 조예가 깊었다. 그는 당대의 으뜸가는 건축가를 발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세웠다. 532년에 착공하여 537년에 완공된 성 소피아 대성당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라고 불렸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성스러운 지혜’란 뜻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을 완성하고 난 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 거대한 위용에 감격하여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를 택하시어 이 거룩한 성전을 완성케 하신 하느님을 찬양할 지어다. 솔로몬 왕이여 내가 드디어 그대를 능가했소.”

복원된 모자이크화.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고, 우측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성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의 특징은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내부에 거추장스러운 기둥을 일체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탁 트인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힘의 평형을 이용하여 건물 중앙의 거대한 돔을 양쪽의 반원형 돔이 지탱하도록 하는 건축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높이가 55.6m에 달하고 중앙에 있는 거대한 돔은 직경이 무려 31.7m에 달했다. 또한 벽돌 사이에는 공간을 둬서 공기가 통하게 했고, 이는 지진과 같은 외부 충격에도 건물이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실제로 1999년 터키에서 리히터 규모 7.4의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현대식 아파트와 연립주택 15만채가 무너졌는데, 성 소피아 대성당만큼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성 소피아 대성당

1,000년 가까이 비잔티움 제국의 자존심이자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은 15세기 중반 야심만만한 오스만 제국의 젊은 술탄에 의해 그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스물 한 살의 젊은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도 면밀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준비했다.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단한 후 유럽인과 아시아인으로 각각 편성한 군대와 가공할 위력을 지닌 대포를 집결시킨 뒤 도시를 포위했다. 두 달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전사했고, 1453년 5월 29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처음 본 순간 웅장한 규모와 완벽한 예술적 미(美)에 감탄한 나머지 차마 이 건축물을 허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술탄은 대성당을 모스크, 즉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 소피아 사원의 내부 모습.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예술 장식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대성당을 모스크로 탈바꿈 시키면서 제일 먼저 없앤 것은 벽면의 모자이크 성화(聖畵)다.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달리 성화를 엄격히 금한다. 초월적인 신(神)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라는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자이크 성화는 석회를 발라 안보이게 처리했다. 이슬람 사원으로 바뀐 내부 공간은 알라와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아랍어 서예로 장식되었다. 건물 바깥 주변에는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이슬람식 첨탑을 4개나 세워 이슬람 종교 건축물 분위기가 물씬 풍기게 만들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을 모델로 모스크를 짓다

그리스도교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뀐 성 소피아 사원은 후대의 오스만 제국 건축가들이 터키 고유의 모스크 양식을 발전시키는데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들은 이 건축물처럼 완벽한 균형미를 지닌 모스크를 짓고 싶어 했으면서도 동시에 이보다 웅장한 모스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세우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 한쪽 구석에 품고 있었다. 특히 건축가들의 최대 관심사는 직경이 무려 31.7m에 달하는 성 소피아 사원의 중앙 돔에 필적할 수 있는 돔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이 과업에 도전장을 내민 자는 이슬람 세계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미마르 시난(1490~1588)이었다.

미마르 시난의 최대 걸작 셀레미예 모스크.

시난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대제의 치세 동안에 활약했던 건축가였다. 그는 99세의 나이로 삶을 마칠 때까지 300개가 넘는 건축물을 지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셰흐자데 모스크, 술레이마니예 모스크, 셀레미예 모스크 등이다. 1548년에 완성한 셰흐자데 모스크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술레이만 대제의 아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인데 중앙 돔의 직경이 19m에 불과하여 성 소피아 사원에 한참 못 미쳤다. 1558년에 완성한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는 외관이 웅장하긴 했지만 중앙 돔의 직경은 27m에 머물렀다. 하지만 시난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1574년에 중앙 돔의 직경이 31.3m로 성 소피아 사원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셀레미예 모스크를 완공했다. 시난은 이에 만족했는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셰흐자데는 견습생이었을 때 작품이고, 술레이마니예는 내 최초의 작품이며, 셀레미예는 내 걸작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스스로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인정한 셀레미예 모스크를 완성했을 때 시난의 나이는 84세였다.

셀레미예 모스크의 중앙 돔 모습. 돔의 직경이 성 소피아 사원의 것과 거의 근접했다.

시난 이후에도 성 소피아 사원을 따라잡기 위한 도전은 계속되었는데, 흔히 우리에게 ‘블루 모스크’라고 알려진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가 대표적이다. 시난의 수제자 메흐메트 아가가 1609년부터 1616년까지 7년에 걸쳐 건설한 이 모스크는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이 푸른색과 녹색 위주여서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착공 당시 술탄 아흐메드 1세는 메흐메트 아가에게 성 소피아 사원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짓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 모스크의 중앙 돔은 직경이 23.5m에 그쳐 성 소피아 사원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성 소피아 사원을 능가한 점이 있다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첨탑의 수를 4개에서 6개로 늘렸다는 것 정도뿐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 소피아 사원의 내부 모습.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예술 장식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오스만 제국 멸망 후 근대 터키 공화국을 건설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성 소피아 사원을 교회도 아니고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장한 성 소피아 사원에서는 석회로 덮였던 예수와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가 복원되어 전시되었다. 매년 이곳을 찾는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은 하나의 건축물 공간 안에서 최고 수준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정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이 박물관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를 초월한 관용과 공존의 상징으로 찬사를 받아왔다. 그런데 최근 이슬람주의를 표방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 건축물을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국제적인 종교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무엇이 인류의 공생공존과 종교간 화합을 위한 정책일지 역사가 주는 교훈을 곰곰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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