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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는 취업준비 중인 30대 미혼 남성입니다. 직업이 없어 부모님과 함께 지내지만 폭언하는 어머니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어렸을 때 많이 혼났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는 좋았어요. 어머니와 종종 책방에도 갔고요. 책 읽는 게 좋아서 새벽까지 책을 읽었고, 다 읽으면 어머니는 또 책을 사주었어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음악, 운동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어요. 아버지는 자상하셨지만 집에서는 말수가 별로 없으셨어요. 아침에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셔서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어머니로부터 처음 혼난 기억은 여섯 살 때쯤이었어요. 무슨 이유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한겨울에 맨발에 내복차림으로 집밖으로 쫓겨났어요. 울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제 가방과 신발, 책들이 밖으로 날아왔어요. 한참 후에 이웃의 도움으로 집에 들어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는 매도 들었어요. 장난감 모형 골프채로 손바닥과 종아리를 때렸죠. 도망갈 곳 없이 방문 뒤에 세워놓고 한참 맞은 기억이 납니다. 먹물이 묻은 붓으로 맞을 때는 먹물이 하얀 벽에 쫙쫙 튀어 마치 공포영화에서 피가 튀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공포스러웠어요.

게티이미지뱅크

커가면서 체벌은 줄었지만 폭언은 심해졌어요. 공부를 곧잘 했지만 집에만 오면 엄마의 구박이 시작됐어요. ‘중학생이 이것도 몰라, 가서 사전 찾아봐’ ‘하나 틀릴 걸 뭐 하러 틀리냐’ ‘오늘도 만점 못 받았니’ 등 단 한번도 칭찬을 해주지 않았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차피 인정도 받지 못한단 생각에 공부에 흥미를 잃고, 한때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했어요. 시간만 보내다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늦은 나이에 갔습니다. ‘학벌은 꼬리표’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제가 다니는 학교도 창피해합니다. 늦게 나가면 ‘일찍 좀 다니지, 누가 보면 야간대학 다니는 줄 알겠다. 그렇게 늦게 다니면 내가 동네 창피해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니. 어떻게 너는 네 생각만 하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가뜩이나 어린 동기들이 ‘나이 먹고 고작 여길 왜 들어왔지’라고 비웃는 듯해 늘 위축돼 있는데 어머니의 폭언은 그런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집에서 나오고 싶지만, 돈도 없고, 부모님께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차라리 학교를 중간에 그만뒀어요.

연애할 때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저를 비하해요. 행복해하는 저에게 ‘너한텐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걔였으면 너 같은 애 안 만난다. 뭔 말인지 알지, 오해하진 말고’라고 했어요. 그 이후에도 ‘걔 생각 없이 사는 애 아니니’ ‘걔가 제 정신이 아니거나 아님 양다리일거야’라는 말도 했어요. 본인 아들을 좋아해주는 여자를 두고 왜 저렇게 얘기하시는지 정말 이해가 안됐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여자친구와도 헤어졌습니다.

여전히 어머니는 말을 할 때 화를 내고, 공격적이에요. 그러다 보니 대화가 잘 안됩니다. 저는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어머니는 ‘내가 라디오냐, 똑같은 얘기 두 번씩 하게. 한번 얘기할 때 잘 들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면서 곧잘 화를 내요.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하고, 대화해보려 하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네가 잘 못 알아들으니깐 그렇지’라며 폭발합니다. 좋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기분 나쁘게 얘기한다며 오히려 저를 나무라고요. 저도 어머니가 고함을 지르니 언성이 올라갈 때가 있어요. 매번 대화가 다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저뿐 아니라 주위 분들과도 비슷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려고도 노력해보고, 저도 다른 방향으로 관심을 돌리고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최진호(가명ㆍ32세ㆍ취업준비생)

진호씨, 당신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제일 괴로웠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당신의 어머니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 중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당신이 제일 먼저 떠올린 기억은 집에서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경험이었어요. 맨발에 내복만 입고 쫓겨났고, 어머니가 던진 물건을 주우며 겨우 집에 들어갔지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거절을 경험했어요. 집은 부모가 장만했지만, 부모만의 공간은 아니에요. 아이에게 집은 따뜻하고, 기댈 수 있고, 안정적인 보호막 같은 곳이어야 해요. 이곳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이유가 어떻든 당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에요. 더군다나 맨발에 내복 상태로 이웃과 마주쳤을 어린 당신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을까요.

그 다음 충격적인 기억은 어머니로부터 맞은 경험이에요. 마치 피가 튀듯 먹물이 튀었던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웠을까요. 이런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아이가 태어나서 평생, 최소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이는 부모와 많은 상황을 함께 해요. 매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인상 깊었던 경험은 대체로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어떻게 끝이 났는지가 중요해요. 영화나 드라마 엔딩처럼요. 진호씨는 어머니와의 기억이 대체로 너무나 두렵고, 공포스럽고, 긴장되고, 잔인한 장면으로 끝났어요. 대학생인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당신을 창피해했고, 수치심을 줬어요.

당신은 이제껏 커오면서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거절과 폭행을 당했고, 두렵고 잔인한 감정들을 경험했고, 언제나 지적하고 비하하고, 나무라는 그런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 느꼈어요. 당신을 떠올리면 맹수가 사는 사파리 안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떠올라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지 당신이 기억하는 생생한 사건들을 통해 잘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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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씨, 보통은 부모로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경험하면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책도 찾아보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건강하게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다는 건 원래 당신은 올바르고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화도 잘 안 낼 거예요.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해결되지 못한 갈등과 미성숙함, 취약성, 나쁜 면들이 있지요. 그런데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당신 내면에 있는 미성숙하고, 취약하고, 때로는 나쁜 면들이 겉잡을 수 없이 드러나요. 당신이 정말 원치 않은 형태로 대화가 흘러가고, 결국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요. 평소의 당신답지 않게 어머니에게 악을 쓰게 되지요. 어머니는 매번 악화된 상황을 당신 탓을 하고, 당신을 비난할 거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마도 당신이 너무 억울하고, 힘이 드는 부분일 거에요. 당신은 어머니와는 다르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어머니하고만 있으면 마지막 장면에서 당신은 굉장히 나쁜 사람이 돼 버리는 거지요. 그게 당신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고 당신이 굉장히 괴로워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당신은 원래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이고 싶기 때문에, 저에게 ‘엄마와 단절해도 될까요?’라고 묻지 않고 ‘엄마와 어떻게 지내면 좋을까요?’라고 묻고 있어요. 어머니와 단절할 수 없는데,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결국 당신의 취약한 면이 드러나고, 어머니와 대면상황에서는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당신이 직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당신을 괴롭히는 거지요. 저는 그런 진호씨가 한없이 가엾고, 너무 마음이 아파요.

어머니는 왜 그렇게 당신에게 폭언을 하고, 힘들게 하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 당신의 어머니는 정서발달이 잘 안된 사람이에요. 당신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겠지만 어머니는 본인의 감정이 더 중요한 사람이지요. 자기의 감정과 기준에 따라와주지 못하면 화가 나고, 화가 넘쳐서 폭발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감정이 폭발하면 상대를 응징하려고 해요. 그 응징은 상대를 비난하고, 모욕하는 걸로 표현합니다. 진호씨가 늦게 다닌다고, 야간대학 다닌다고 누가 손가락질을 할까요? 그건 순전히 어머니의 감정입니다. ‘내가 창피하다’라고 말하는 대신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니’라는 식으로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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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책을 많이 사준 이유도 어머니를 위한 행위였을 거에요. 책을 사주면서 본인의 행동이 훌륭하다고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지요. 어머니는 양과 크기로 측정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책을 사주는 횟수와 책의 개수로 측정하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확신했겠지요. 두 번째는 책을 많이 읽으면 나중에 명문대에 진학하겠지 하는 기대가 있어서였겠죠. 둘 다 어머니를 위한 거였어요.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부모라면 어깨를 토닥여주고 격려해주고, 따뜻하게 손을 한번 잡아줬을 거에요. 그랬다면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이 남아있었겠지요.

어머니가 철저히 자기 감정을 중시하는 강하고 센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거의 관여를 하지 않고, 피해 있었어요.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일찌감치 어머니와의 진정한 대화를 포기했을 거에요. 그래야 그나마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깐요. 아버지 또한 부인과 대화를 하려고 시도하면, 본인이 물건을 던지거나, 화를 내거나, 폭행을 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있었을 거에요. 진호씨처럼 아버지도 자기 안에 있는 나쁜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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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씨, 당신이 저에게 ‘어머니가 박사님을 만나면 좀 달라질까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쉽지 않을 거예요’라고 답할 거예요. 제가 혹은 당신이 어떻게 해도 어머니를 바꾸기는 어려울 겁니다. 당신을 낳아서 길러주고, 본능적으로 당신을 사랑했고, 간혹 어쩌다 챙겨주기도 했겠지만 어머니는 당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많이 줬어요.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가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러니 어머니와 대화를 하는 것에 너무 의미를 두거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몰두하지 마세요. 그런 노력을 기울일수록 당신이 받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의 덩어리가 건드려지면서 당신도 모르게 나쁜 행동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러면 또 당신은 그런 모습이 괴로울 거예요. 어머니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분이에요. 모든 기억을 싹 지울 순 없겠지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하기보다 일상의 말만 주고 받되, 당신의 미래에 집중하도록 해보세요.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에 당신의 학업, 취업, 연애 등에 해가 되지 않도록, 혹독하게 인생을 배웠다고 생각해봐요.

진호씨, 지난 일은 지나간 시간일 뿐이에요.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결핍은 당신이 앞으로 만날 배우자, 가족, 아이와의 관계에서 충분히 채울 수 있어요. 이제부터 수많은 날들의 새로운 시간을 기대해보세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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