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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는 현상부터 근원까지 이야깃거리를 몽땅 끄집어 내고 싶은 ‘한국일보’의 멀티 플랫폼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텍스트, 비디오, 데이터 등등. 가능한 모든 도구로 사람과 사회, 역사와 현상을 연결 지어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찾아 뵐게요.

지난 회 제작을 마치고 달력을 보니 다음 ‘오리지너’ 콘텐츠 출고일이 4월 14일이었습니다. 4월 중순. 한국인이라면, 그 중에서도 기자 생활을 몇 년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4월의 세월호’를 피해갈 수 없는 걸 압니다. ‘기레기’라는 저주 섞인 비난이 왠지 더 크게 들리는 계절입니다. 애써 외면하고, 숨고 싶은 때입니다. ‘난 그래도 덜 기레기였다’는 쓸모 없는 변명도 되뇌어 봅니다.

그게 벌써 5년째입니다. 우리가 세월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많은 언론이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오리지너’도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다 이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우리를 기레기라 부를까. ‘세월호’와 ‘기자’라는 단어가 조합되는 순간, 반사적으로 ‘쓰레기’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 상황을 그냥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고 모른 체 해도 될까. 우리는 그 해 4월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오리지너’를 만드는 겨우 몇 명이 고민해 봐야 답을 낼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기자가 취재원을 압박하듯,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기자에게 하지 않는 질문들을 말이죠. 우리가 희생자 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관찰과 취재를 당해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 해 4월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사진을 찍다 멱살을 잡혔던 김주성 기자와 전남 목포시 병원 영안실에서 유족에게 들러 붙었던 박소영 기자, 경기 안산시 분향소에 있던 유족의 눈을 피하려 먼 주차장으로 돌아서 다녔다는 김기중 기자, 진도체육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차려준 밥을 먹으며 유가족의 이야기를 엿들었던 조원일 기자 등 한국일보 기자 4명이 2019년 4월 10일 한국일보 16층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4월 뉴스로만 세월호를 봤던 김창선 PD가 ‘오리지너’를 대표해 기자들을 취재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오리지너 “2014년 4월 16일, 뭘 하고 있었나요?”

김주성 기자 “아침에 회사에 나와서 YTN 뉴스를 보는데, 사진부니까 (세월호) 사고 현장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어요. 서울 강남경찰서 담당 기자를 만나서 같이 출발하는데 전원 구조 소식이 들렸죠. 사진 찍고, 구출 미담 쓰고, 구조 잘했다고 쓰면 되겠다고 농담하면서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양희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였던 것 같은데, 생존자 인터뷰가 나오는 거에요. 너무 황당한 거죠. 다 구조가 됐구나 했는데 낮 12시쯤? 상황이 바뀐 거에요. 오후 4시쯤 진도에 가서 부모님들 만나고 팽목항을 왔다 갔다 한 게 너무 생생히 기억나요. 정말 잊고 싶었는데.”

김기중 기자 “그 때 경기도 담당이었는데 우연찮게 안산에 다른 취재를 가고 있었어요. 단원고 학생들이 탔다는 건 몰랐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금방 구출될 거 같다고 하니 잠깐 들러 분위기만 보고 와라’ 해서 중앙지 기자 중에서는 제일 빨리 도착했거든요. 소식 듣고 온 부모님들 20, 30 명 정도가 강당에 모여 계셨는데 그 때 이미 그곳은 아수라장이었어요.”

오리지너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처음 들었나요?”

조원일 기자 “처음에 피해가 크지 않다 싶었을 때는 솔직히 ‘아, 경찰팀 후배들 엄청 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얘들이 진도까지 내려가면 주말이고 뭐고 없겠다. 현장 교대 가능 인원이 몇 명이 안될 텐데, 회사에서 숙소 구하는 문제 같은 건 신경을 써줄까. 그리고 나서 피해가 커지니까, 나보고도 가라고 하겠구나 싶었어요.

두 가지 감정이 같이 들었어요.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다시는 있지 말아야 할 큰 사건인데 현장에 갈 수 있으니 잘됐다고 생각하자. 다른 하나는, 그런데 도대체 장례식 취재를 얼마나 해야 할까, 싫다,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이전에도 빈소 취재 하면서 욕 많이 먹어 봤으니까.”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해상에 6,825톤급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가운데, 사고 사흘째인 2014년 4월 18일 오전 사고 해역에서 해양경찰 보트들이 사고선박 주변을 맴돌고 있다. 진도=코리아타임스
◇야만이 덮친 바다

오리지너 “처음 본 현장의 모습은 어땠나요?”

박소영 기자 “4월 16일 밤에 내려가서 17일부터 취재를 시작했어요. 주로 목포에 있었는데, 전국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 절반은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기자가 많았어요. 취재 스팟이 몇 군데 있는데 저는 후배와 장례식장을 맡았죠. 희생자의 슬픈 사연을 찾는 거에요.

장례식장 취재는 사실 사회부 기자가 굉장히 많이 하는 작업인데 그 때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많았어요. 단원고 희생자 친구들로 보이는 시신이 올라오면, 신원 확인을 해야 하잖아요. 그 시신 확인을 당시 세월호에 같이 타고 있다가 구조된 선생님들에게 다 시킨 거에요. 부모님들은 아직 못 내려온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데 기자들은 당장 기사를 써야 하고 몇 학년 몇 반 누가 사망했는지를 카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선생님들에게 가서 물어보는 거에요.

이런 질문이 적절한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요. 기자는 너무 많고, 기사는 빨리 나가야 하니까.”

오리지너 “현장에서 갈등한 적도 없나요?”

박소영 기자 “있죠. 사나흘 정도 지났나? 구조 오보 등등해서 이미 기자들은 기레기로 너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던 때였어요. 낮에 어느 아버지가 목포의 장례식장으로 택시 타고 오셨는데, 자녀 시신을 확인하러 오신 거에요. 단원고 학생을. 그 분이 영안실 쪽으로 가니까 다른 기자들도 2, 3명이 따라갔어요. 그런데 그 분이 자기 애가 맞는지 자기 부인이랑 확인을 한다고 시신 사진을 찍어서 부인한테 보낸 거에요. 근데 부인이 아니라고 하신 거죠. 이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면서 나오셨어요. 우리 애 아니라면서. 그 당시는 이미 (배가 침몰하고)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지만, 내 아이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이러면서 팽목항으로 다시 가시는 거에요.

내 아이인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시신의 사진을 찍고 보내는 게 옳은 걸까. 내 아이가 아닌 것에 감사하면서 돌아 가시는 모습은 대체 뭘까. 머리가 뭔가에 ‘띵’하고 맞은 것 같았어요.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윤리적인가. 장례식장에 못 가겠더라구요.”

◇‘기레기’의 자백

오리지너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김주성 기자 “부서 특성상 재난 현장을 많이 가요. 가면 기본적으로 할 일이 있어요. 주변 스케치를 하고, 사람들 반응 보고, 사진을 어떻게 찍을지, 순서는 어떻게 할지. 그런 생각을 하죠.

하지만 다 구출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게 되니까 예전에 습득한 취재 방식이 다 안 맞아요. 그런데 한쪽에선 비겁하게도 습관대로 취재하려는 내 모습이 나오는 거에요. 사진기자들은 최대한 현장 가까이 가려고 하거든요. 세월호 현장은 가까이 갈 게 아니라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는데 자꾸 내가 들어가는 거에요. 마음에선 ‘들어가면 안돼’ 이러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제가 너무 싫었어요.”

오리지너 “지시라기보다는 습관에 따라 움직인 건가요?”

김주성 기자 “습관이죠. 그 때 수많은 오보를 냈던 매체는 다 마찬가지일 거에요. 빨리 기사를 써야 한다는 습관 속에서 배운 루틴한 방식 때문에. 그런데 잘못된 거잖아요. 세월호 전까지는 우리가 잘못된 걸 모르고 계속 살았던 거에요.”

오리지너 “희생자 가족에 대한 무리한 취재 경쟁이 특히 문제가 됐습니다.”

박소영 기자 “장례식장에서는 기자들도 다들 주저해요. 내가 저 사람한테 대뜸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게 비윤리적인 걸 다들 안단 말이에요. 처음엔 다들 접근 못하고 눈치 보는 게 느껴져요. 그런데 어느 한 기자가 물었을 때 상대방이 화를 내지 않고 대답을 해 주면, 그러면 진짜 기자들이 우르르 그 사람에게 몰려들어서 묻기 시작하는 광경을 너무 많이 봤거든요. 이런 상황들이 반복이 되고, 어쨌든 기자들은 사연을 써야 하니까.”

오리지너 “박 기자도 몰려가는 기자들 중 한 명이었나요?”

박소영 기자 “네.”

조원일 기자 “처음 가게 된 현장이 진도 실내체육관이었어요. 팽목항에 숙소가 없어서 실종자 가족들이 쉴 곳으로 마련된 곳이죠. 이불이 바둑판처럼 깔린 농구장 코트 바닥에 형광등이 24시간 내리 쬐고 있었던 거 같아요.

저희도 잠을 잘 못자는 상황이어서 체육관 스탠드에 올라가서 잠깐 쪽잠을 자다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가족들이 있는 곳을 내려다 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체육관에 현황판이 있었어요. 인양된 시신의 간략한 특징이 적힌 종이를 붙여 두는. 시간마다 종이가 붙으면 가족들을 뒤 따라가서 보고 누가 말하면 몰래 받아 적고. 차마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어요. 이미 그 때는 기자가 상종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거든요. 밥을 먹어야 하는데 주변에선 식당을 못 찾았어요. 자원봉사자 분들이 가족들을 위해 만든 밥을 몇 번 먹었는데 너무 눈치가 보여요. 구석에 앉아가지고. 어떤 사람은 저보고 가족인 줄 알고 힘내시라고 했는데 조용히 밥을 먹었어요. 기사 댓글을 보면 ‘니들이 뭔데 그걸 처먹냐’ 이런 내용이 있었죠. 있는 듯 없는 듯 지냈어요.”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7일째인 2014년 4월 22일 오전 자원봉사자들이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들어온 구호품을 정리하고 있다. 진도=코리아타임스

오리지너 “가족들의 분노를 직접 접한 적이 있나요?”

김주성 기자 “저는 좀 많이 겪었어요. 첫날 체육관 현황판 앞에서 부모님들이 주저앉아서 슬퍼하고 계셨는데, 그 때는 기자들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팽목항으로 가셔서 먼 바다를 보면서 계속 우시는 거에요. 날은 저물고, 자식을 기다리는 모습을 찍는데 그 때부터 화를 내셨어요. 나오라고, 그만 좀 찍으라고, 너네(기자)들 대체 왜 그러냐고.

엄청나게 많이 욕도 먹었고 저는 멱살도 잡혀보기도 했는데. 뭐, 그래도 됐죠.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어요. ‘욕을 먹어도 싸지. 우린 욕을 먹어도 싸’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부모님들이 언론을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단원고도 갔거든요. 학생들 모습 찍으러. 못할 짓이잖아요. 친구들이 실종이 돼서 생사를 알 수 없는데 그 학생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찍으려고 기자들이 쭉 모여서 기다렸어요. 학생들도 막 욕을 하죠. 손가락질 하고. 그런 게 되게 힘들었어요. 안산에 분향 온 사람들 찍고 있으면 와서 멱살잡고 욕을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대부분 그냥 무기력하게 당하고. ‘죄송합니다’ 그랬던 거 같아요.”

오리지너 “그러고 나서도 잠시 피했다가 다시 찍었나요?”

김주성 기자 “그렇죠. 음, 카메라가 되게 폭력적이거든요. 철컥철컥 셔터 소리를 내잖아요. 가슴이 아픈 사람들한테, 허락도 안 받은 거잖아요. 그걸 우리가 찍고 있는 거에요. 그 분들의 슬픈 모습, 망연자실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막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오리지너 “왜 그랬나요?”

김주성 기자 “갈등이 계속 있었죠. 어디까지 할까를 정하는 게 힘들었어요. 당연히 우리가 국민들에게 참사를 알리고 얼마나 큰 괴로움과 고통이 있는지 알려야 하잖아요. 그래야 잊지 않고 다시 반복되는 걸 막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과연 어느 정도 선까지 그걸 해야 하는지. 정리가 안됐던 것 같아요.”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실내체육관 앞에서 세월호 생존자 명단을 확인하는 실종자 가족들이 가족 이름을 찾으며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진도=김주성기자

오리지너 “기사 작성 중에도 갈등이 많았을 거 같아요.”

박소영 기자 “초반에 어느 방송 앵커가 단원고 학생에게 묻잖아요. 친구가 사망한 걸 아는지. 그 학생은 처음 듣고 완전 패닉에 빠지고. 정말 폭력적이었고, 국민들에게 욕도 굉장히 먹었죠. 하지만 그런 취재 지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저한테도 왔어요. 가족들에게 직접 묻지를 못하니까 대화 나누는 상황만 멀리서 스케치 해서 기사로 보냈는데 회사에서는 ‘그 친구 몇 학년 몇 반인데, 반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추모의 말이라도 받으라’는 거에요. 분명히 방금 방송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전국적으로 욕을 먹었는데 나한테도 하라고 하는 거에요. 결국 안 하긴 했지만. 기레기라고 욕 먹을 때 ‘내가 왜 기레기야, 왜 나한테 이래!’라고 한 현장 기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 내가 기레기 짓을 했지’라고. 위에서 계속 쪼였죠. ‘왜 이거밖에 못 썼냐 딴 데는 사연 붙여서 이만큼이나 썼는데 왜 더 안 나오냐’ 이러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어쩌지? 이러다가 무리를 하거든요. 팽목항에서는 기자가 욕을 먹으니까 화장실에서 가족들 몰래 대화 듣고 쓰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무리를 하니까 충돌이 생기고 또 욕을 먹는 게 반복 되죠. 그 때만큼 현장기자와 데스크의 인식 격차를 크게 느낀 적도 없어요.”

2014년 4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기자협회 주최로 '세월호 참사보도 문제점과 재난보도 준칙제정 방안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앞서 한국기자협회는 세월호 참사 관련 일부 언론의 부정확하고 자극적인 보도와 부적절한 취재행태 등으로 국민적 불신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지난 20일 '세월호 참사보도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뉴시스.
◇핑계, 변명 혹은 불만과 분노

김기중 기자 “카메라 들이미는 게 공격적이라고 했는데 사실 사진기자가 부러웠어요. 사진기자는 현장만 찍으면 되는데 저희는 그 분들을 잡고 하기 싫은 얘기를 끌어 내야 하니까.”

조원일 기자 “전 방송기자가 부러웠어요. 참사 있고 거의 한 달을 그랬던 거 같은데, 제일 힘든 때 중에 하나가 아침이에요. 편집국 회의가 끝나면 세월호로 신문지면을 10개 가까이 비워놔요. 기사로 채우라고.”

오리지너 “뭘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용은 채워야 한다는 건가요?”

조원일 기자 “네, 지면계획에 큰 제목만 달려 있어요. 희생자 사연, 학생들 사연, 단원고 풍경, 팽목항 풍경, 구조 상황, 무슨 상황. 사실 현장에서 보면 매일 크게 달라지는 건 없거든요. 누군가 시신을 찾아가면 체육관에 붙은 종이가 바뀌고, 떠난 가족 자리에는 빈 이부자리만 남고. 제가 무능해서 그랬겠지만, 사실 보고할 게 그거 밖에 안 보였어요. 계속 눈치를 보면서 엿들어 보려고 가족 주변을 서성거려도 봤는데. 그런데 이미 기사가 엄청나게 예정돼 있는 거죠. 그 중 몇 개는 내가 무조건 채워야 하는데, 갚아도 갚아도 끝 없는 빚을 진 기분이었어요.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방송 뉴스는 그날 화면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세월호 보도가 중요한 건 당연히 알죠. 그럼 기자를 더 늘리든지, 기사의 관점을 바꿔서 풀어 나가든지. 윗분들은 현장도 모르고 그저 아침에 다른 신문 보고 지면 계획을 짜는 건가. 다른 데서 희생자 사연이 10개가 나오고 우리가 7개 나오면 우리가 못한 거고. 아무 대책도 없이 기자들을 떠미는 거 아닌가, 그런 불신이 컸죠.”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46일째 진행 중이던 단식을 중단하키로 한 2014년 8월 28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동부병원에서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입장을 발표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오리지너 “회사와 소통은 어땠나요?”

김기중 “전화로도 대화할 여력이 없었어요. 아침 편집회의가 끝나면 (아이템이) 없는 상태에서 기사 쓸 걸 보고해야 하는데. 안산만 해도 초반에는 기자가 저 포함 둘이 있었거든요. 기본으로 둘이서 2개면(원고지 50매 분량)에서 많을 때는 3개면을 메우는 상황이었어요.

안산은 가족들 회의가 야간이니까 상황을 반영해서 계속 기사를 수정해요. 밤 12시가 넘어요. 소통할 시간이 없죠. 통화를 해도 딱 지시하는 내용만. 긴 통화를 해본 적이 없었어요.”

박소영 기자 “초반 보도는 패턴은 딱 정해져요. 수색, 구조, 침몰 원인, 해운사 관계 등등. 현장에서는 해경을 마크하고 가족들을 취재하고. 팽목항, 목포 병원의 인원, 상태, 그리고 먼저 나온 선원들까지. 사건의 윤곽을 잡기 위해 초반 며칠간은 총력전이에요. 그런데 기자가 정말 괴로운 시기는 이 총력전 다음이에요. 현장 분위기는 기자에게 너무나 험악해져 있는데, 위에서는 끊임 없이 ‘희생자 사연 가지고 와라, 뭐 이런 얘기 더 없냐’고 요구하죠.

그나마 한국일보는 그렇게 기레기 짓을 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언론과 나중에 비교해 봤을 때도 차분한 톤을 유지했어요. 오히려 분초를 다퉈가면서 위에서는 속보 치라면서 욕하고, 사연 내놓으라고 하면서 무리한 취재 지시 받았던 다른 회사의 현장기자들 상황을 생각하면, 끔찍한 거죠.”

조원일 기자 “왜 이렇게 대책도 없이 기사를 많이 쓰려는 건지, 당장 쓸 수 있는 게 없는 걸 모두가 아는데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런 이야기라도 좀 나눴으면 나았을 텐데. 현장에 있으면 회사에 대한 신뢰가 싹 사라져요. 회사가 저에게 가해자 같고, 저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야 하고. 한참 후에는 뭐가 문제인지조차 말을 안 했어요. 답이 안 나온다는 걸 저도 아는 거죠. 요즘도 가끔 윗분들이 그런 말을 해요. ‘다 못하겠다고 하면 신문은 누가 만드냐’ 벙 찌는 거죠.”

◇‘슬픈 사연’이 필요한 기자

오리지너 “희생자 가족 사연 취재가 유독 문제를 일으킨 것 같네요.”

김기중 기자 “안산의 취재기자 대부분이 처음에 고대안산병원에서 취재 활동을 했어요. 후배들한테 처음엔 장례식장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어요. 한 종편의 수습 기자였는데 위에서 유족들 사연 취재를 하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 기자가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단원고 선생님이 막았어요. 거기서 기자가 선생님과 멱살잡이를 하면서 싸움을 벌였어요. ‘당신들이 가족들도 아니면서 왜 쫓아내냐’ 이러면서. 기레기 소리 나오는 건 당연한 거죠.

데스크도 기사 채우느라 정말 힘들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현장에서 가장 싫은 게 사연 기사 쓰는 거였어요. 경력이 어느 정도 있었던 저도 데스크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는데 그 종편 수습기자가 느낀 압박은 어느 정도였을까 싶어요.”

조원일 기자 “진도에 있을 때 회사 차가 1대뿐이라 코스 별로 기자를 떨궈 줘요. 진도군청에서 제가 먼저 내리고 팽목항에는 다른 후배들이 더 타고 가서 내리는 식이거든요. 저는 후배들이 팽목항에서 뭘 하고 오는지 알았죠.

항구에 오래 멍하니 있는 사람들을 찾았을 거에요. 후배는 몇십분 정도 그 사람을 지켜봤겠구나. 쭈뼛쭈뼛 다가가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확인했겠구나. 말을 붙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겠구나. 아마 그 분이 험악하게 생겼는지 아닌지도 고려를 했을 거에요. 자기가 기자라는 이유로 무슨 질문을 하는지 아는데, 그게 얼마나 무섭겠어요. 후배들이 아침에 올린 메모나 전날 쓴 기사를 보면 그런 장면이 빤히 보여요. 보이는데, 저는 그냥 입다물고 아침에 군청에서 내려요. 한 번도 후배들한테 오늘은 내가 팽목항으로 대신 가겠다는 말을 못했어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틀째인 2014년 4월 17일 밤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에서 한 여성이 바다를 바라보며 실종자의 구조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진도=코리아타임스

오리지너 “사연 기사가 필요한 이유가 뭐죠?”

박소영 기자 “사연이 가지는 보편적인 공감의 힘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이라도 내 일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거. 왜냐하면 세월호 참사가 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연은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구조된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이야기였을 거에요.”

김기중 기자 “저도 힘든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해서 정말 사연 기사 쓰는 게 싫었어요. 그런데도 사연만큼 독자들에게 잘 읽히는 기사가 없잖아요 사실. 다른 세월호 기사들은 나머지는 헤드라인만 보고 넘어가기도 하고. 위에서 왜 요구하는지는 알겠는데, 현장에서는 사실 그게 역효과가 더 많이 났던 거 같아요.”

오리지너 “따뜻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면서 과정은 비인간적이네요.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사연 기사를 쓰는 기자도 있지 않았나요?”

박소영 기자 “단시간에 사연 취재하라고 하면 비인간적이 되지만 다를 때도 있어요. 한 후배는 장례식장에 있는 아버님과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소주 마시면서 친해지고 나서야 기사를 썼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매일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김기중 기자 “(기레기 논란 직후) 안산에 가족들이 회의하는 텐트에 들어갈 수 있는 언론사가 3개뿐이었어요. 경향, 한겨레, 오마이뉴스만. 그러다가 JTBC가 가족들 신뢰를 얻으면서 들어갔죠. 저희는 그 때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제가 인터뷰를 했던 한 학생의 부모님이 ‘한국일보도 우리를 대변해 준다’고 다른 가족 분들을 설득해서 그때야 텐트에 취재하러 들어갈 수 있었어요.

한 달 반 정도 지나고 나서야 저희 기사들 논조를 보고 가족들한테서 먼저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아들한테 못했던 얘기, 친구들이 영정사진으로 추억 사진을 찍는 얘기 같은 걸 해줬어요. 결국 사연이란 건 저희가 억지로 쥐어 짜서 쓴다고 해서 가족들과 신뢰가 쌓이거나 콘텐츠가 다양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희 할 일을 충실히 할 때 사연들은 따라오고, 읽힐 기사도 오히려 나중에 더 나왔었거든요.”

박소영 기자 “사연 기사에 계속 매달린 건 결국 (할 줄 아는) 다른 콘텐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세월호는 단시간에 정리될 재난이 아닌 거죠. 기존에 하던 대로 하고 나면 쓸 게 없는 상황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침몰 원인 정밀 분석 같은 탐사 취재를 해야 하는데 회사가 그렇게 인력 전환을 못하는 거죠. 디테일과 복잡한 문제는 하루 이틀 취재로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대신 사연기사는 지시하기는 쉽고 현장에 있는 기자만 괴롭거든요. 닦달하면 욕을 먹어도 쓰니까요. 손쉬운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고 후 학생들의 책상에 꽃과 평소 즐겨 먹던 과자가 놓여 있는 경기 안산시 단원고 2학년의 한 교실.
◇무능한, 너무나도 무능한 언론

조원일 기자 “기레기 논란이 촉발된 지점이 여러 군데 있는데 초기 정부가 발표한 구조 자원 투입 수치가 실제와 너무 달라서 유족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샀거든요. 당연한 얘기죠. 팽목항에서 밤새 울면서 기다린 분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 투입한 배나 인력을 크게 부풀린 셈이고,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 썼으니까요.

제가 그 때 가장 ‘뜨악’했던 건 ‘정부의 자료를 신뢰할 수 없다? 우리가 그럼 뭘 할 수 있지?’ 그 생각이 들었을 때에요. 정부 자료가 유일한 신뢰, 쉽게 말해 팩트였던 거죠. 그런데 그게 깨지고 나니까 우리는 ‘(정부 자료 없이)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우리 손으로 쌓아 올린 팩트가 아무것도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든 거죠. 그런데 후배 기자한테는 가서 사연을 들어보라는 지시를 하고 있어요. 무력감이 정말 컸어요.”

오리지너 “언론이라면서, 언론이 스스로의 힘으로 팩트를 찾을 수 없었다는 건가요?”

조원일 기자 “어떻게 가설을 세우고 팩트체크를 하는지 연습이 제대로 안 돼 있었던 거에요. 현장 기자 대부분이 연차가 낮았거든요. 이 사람들이 몇 번이나 재난을 취재해 봤겠어요. 해경이나 안전행정부의 업무 매커니즘을 알까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데, 더 답답한 건 회사도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는 거에요.”

오리지너 “그럼 대체 현장에서 기자는 뭘 한 건가요.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김주성 기자 “전 당연히 기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거기서는 정부가 말한 것과 다른 일이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기자가 아니면 알려줄 수 없어요. 정부가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몇 명을 투입했다, 그러면 신문이나 방송이 받아 적는 게 아니라 정말 투입됐는지를 보고 따져야 하는 게 기자들이거든요. 우리가 정말 챙겨야 하는 건 그런 팩트들인데, 거기서 사진기자들은 가족들의 슬픈 표정을 찍고 기자는 구구절절 사연을 발굴하는 데만 매달렸던 거죠.”

2014년 4월 16일 서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이경옥 안전행정부 2차관과 부처 관계자들이 전남 진도 해상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사고 관련 대책을 논의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그 때 했어야 할 일

조원일 기자 “당시 사고 해역 취재가 굉장히 제한적이었어요. 실종자 가족들이 사고 해역의 바지선에 상주한 것도 굉장히 나중의 일이었고. 초반에 접근 자체가 사실상 금지돼 있어서, 옆에서 직접 목격하고 지켜볼 수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한 건 정부가 비협조적이라도 어떻게든 취재 환경을 만들어내는 능력이거든요. 현장 기자단을 꾸리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해서라도 사고 해역에 취재 공간을 열었어야 했어요. ‘안되나 보다. 못하나 보다’ 그렇게 포기했죠.”

박소영 기자 “지금 생각해 보면 언론사들이 합심을 해서 배를 빌리든, 정부에 무조건 들어가겠다고 강짜를 부리든 해서, 기자들이 사고 현장을 돌아가며 지켰다면 다를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못했어요.”

김주성 기자 “우리가 정말 비겁했던 게 뭐냐 하면, 마침 사고 해역으로 가는 배가 있는데 탈 수 있는 자리가 몇 개 안돼요. 그러면 배를 타고 현장을 취재하러 나가는 거에요. 다른 회사 기자들 몰래, 나만 찍어야지 하면서.”

오리지너 “그 상황이면 그런 선택이 맞는 게 아닌가요? 누구라도 봐야 하잖아요.”

김주성 기자 “취재해서 나누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경쟁하는 거에요. 그러면 현장 상황이 제어가 안 되요. 하면 안 되는 선을 넘는 거죠.”

조원일 기자 “우리가 정말 무식하고 무능했다고 생각해요. 진위 논란이 생기면 언론이 검증을 해 줘야 하잖아요. 사고 해역의 유속이 엄청나게 빠르고 시야가 흐려서 잠수부가 못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가족들은 이미 정부를 불신하고, 정부는 불성실하게 반박하는 상황에서 언론도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없는 거죠. 누구 말이 맞는지 헷갈리는 거에요.

진도군청에서 정부가 매일 브리핑을 했는데 끝나면 기자들이 질문을 해요. 기자들 대부분이 ‘정부를 못 믿겠으니까 바른 대로 말하라’는 식이에요. 그러면 정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죠. ‘도대체 팩트는 어디 있나. 믿고 쓸 수 있는 숫자는 뭐고 뭐가 거짓말인가’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어요.”

2014년 4월 16일 오전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인천을 출발해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침몰해 해경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진도=연합뉴스
◇비뚤어진 경쟁

오리지너 “현장을 함께 통제할 수 있는 기자들이 많았다면 달랐을까요?”

박소영 기자 “JTBC가 독보적이었던 건 그 점이에요. 사장(손석희 앵커)이 현장에 내려왔잖아요. 희생자의 핸드폰이 JTBC로 가기 시작했고, 동영상이 공개가 되고, 파장이 일고 다시 JTBC로 제보가 몰렸죠. 이 상황을 우리 회사도 알았을 텐데, 손석희 앵커만큼은 아니라도 국가적 재난을 조망하고 가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책임자가 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현장 기자들에게 ‘너희도 동영상을 찾아 오라’고 하는 거에요.”

조원일 기자 “JTBC에서 연일 동영상이 나오면서 가장 괴로운 사람들은 아마도 경쟁 종편에서 일하던 현장 기자들이었을 거에요.”

김주성 기자 “얼마 전 강원도에서 학생들 가스사고 났을 때도 일부 언론은 친구들 메신저를 달라고 요구하고, 무리한 취재가 있었죠. 세월호 때 괴로운 기억이 있다면 후배들한테 그런 취재를 시키면 안 되는 거 잖아요. 5년이 지났는데 똑같아요.”

조원일 기자 “우리가 취재 과정에서 얼마나 비인간적인 짓을 하고 왔느냐 하는 반성은 그냥 현장 기자 몫인 거 같아요. 많은 언론사는 세월호 취재 경쟁에서 JTBC에 패배했다고 생각할 거에요. ‘세월호 때처럼 이번에도 JTBC한테 밀리면 죽는다’ 이런 생각만 남아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악순환이죠.”

지난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기억ㆍ안전 전시공간 개관식에서 한 유가족이 노란 리본이 그려진 대형 천막에 물감을 묻힌 손을 프린팅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다시, 2019년 4월

김주성 기자 “‘오리지너’ 섭외가 들어 왔을 때 ‘왜 하지? 안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기자들끼리도 한 번도 이런 이야기 한 적 없었거든요. 각자 죄인들처럼 마음 속에 담아만 뒀어요.”

오리지너 “말 못한 이유가 있나요?”

김주성 기자 “저도 심리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 있었어요. 팽목항에 있다가 서울 올라와서 와서 평소처럼 주말에 애들 밥을 해주고 있었거든요. 저한테 아이들이 밥 빨리 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소리를 확 질렀어요. ‘조용히 하라고!’ 애들이 깜짝 놀랐죠. 와이프도 놀라서 뛰어 나오고. 저도 모르게.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팽목항에서 그러고 왔는데 우리 애들이 밥을 달라고 하는 행복한 모습이, 화가 나는 거에요. 그러고 나서 저는 세월호 기억은 아예 입을 닫았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때로 돌아가서 없었던 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 될 줄 알면서.”

김기중 기자 “회사에 불만이었던 게, 그 많은 기자들이 겪었던 상황을 들어주는 자리조차 없었거든요. 그런 과정이 있었으면 좀 더 발전적으로 바뀔 수 있었을 거 같은데. 회사도 그런 경험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뭔가 최소한, 공식적으로 ‘너희 힘들었던 거 없었냐’라고 물어라도 봤었어야 했는데 없었어요. 그때부터 각자 세월호에서 받은 상처를 가슴 안에 담아 버린 거 같아요.”

오리지너 “심리치료 같은 방법도 있을 텐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건 피하고 싶어서였나요?”

박소영 기자 “피하고 싶다기보다, 기자는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현장기자가 고생하는 건 당연한 거지, 그거 했다고 심리치료까지 받아?’라는 분위기가 당시에는 팽배했어요.

광주교육연수원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목포신항을 방문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리본을 달고 있다. 사진=광주시교육청 제공

김기중 기자 “7월 말까지, 안산에 워낙 오래 있다 보니 슬슬 제가 정상이 아닌 걸 느끼긴 했어요. 우연히 다른 회사 기자를 따라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약물치료 대상이라고 하더라구요. 내가 어째서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하냐고 물었죠.

안산 분향소가 화랑유원지 한가운데 있었는데 처음에는 유원지 분향소 옆이 한동안 가족들 전용 주차장이었어요. 그런데 가족 주차장이 빠지고 나서 한참 후에도 제가 가까운 곳에 차를 못 대고 멀리 댄 다음에 돌아가고 있었던 거에요. 그 때는 저도 그걸 전혀 인식을 못했어요. 분향소 지나면서 맡았던 향 냄새, 스피커에서 나오는 조곡들. 이런 게 너무 싫어서 먼 길을 돌아가고 있었던 거에요. 안산에서 철수하고도 한 달 동안 조곡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약물치료를 받아볼까 고민하다가 그러면 기록이 남게 되니까, 버텨보자 그랬죠. 그 뒤로 세월호 취재 얘기는 한 번도 안 했어요.”

◇짊어진 초라한 ‘십자가’

오리지너 “세월호 취재 후에 변한 게 있나요?”

박소영 기자 “좀 간지럽지만, 저는 기자 하게 된 계기가,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기여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게 있었거든요. 취재가 재밌기도 했고. 그런데 세월호 취재를 하면서,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난 기레기가 되는 거에요. 하라는 대로 하고, 기사를 쓰면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생기고. 그 후부터는 ‘내가 뭐라고’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생겼어요. ‘내가 그래도 좋은 일 하고 있구나’ 이런 마음이 들다가도 건방지고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고. 내 직업이 뭔가 정의를 구현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내려놨어요. 그냥 폐 안 끼치고, 왜곡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싶은 거죠. 해봐야 뭐 하나. 써봤자 기레기 소리나 들을 텐데, 그런 생각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가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진행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전국학부모 기자회견' 중 한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조원일 기자 “세월호 취재 후에 법조팀으로 복귀를 했는데, 한동안은 ‘나쁜 놈을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맹목적으로 집착했어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거 같았어요. 해수부 비리 같은 걸 막 뒤지고. 그러다가도 기자들이 가족들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이 떠오르면, 우리는 영원히 시민들에게 버림 받았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요.

이게 왜 무섭냐 하면, 사실은 어느 기자든 한 번은 아무도 쓰지 않은 기사를 쓸 기회가 오거든요. 정말 중요한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도 내 기사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은 공포. 난 기레기니까. 그 생각이 들면 좀 무서워요. 물론 제가 잘못한 게 많죠. 아무리 용을 쓰고 취재해 봐야 알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컸어요.”

김기중 기자 “전 그 뒤로 그냥 회사원이 된 거 같아요. ‘나한테 주어진 그 역할만 하자.’ 예전에는 사회부가 아니어도 관심 가는 일이 있으면 잠시라도 이야기 들어보고 그랬는데, 세월호 이후부터는 그래 본 적이 없어요. 기자가 이래도 될까 싶기도 한데, 잘 안 되요. 내가 취재를 하면 좋은 소리 못들을 거 뻔한데 스스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할까 싶기도 하고.”

김주성 기자 “이전에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민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도체육관에서 우리는 가족들이 있는 코트로 못 가고 스탠드 위에만 있었어요. 이미 사람들이 우리를 배척했죠.”

박소영 기자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나중에 그 스탠드에 A4 용지가 붙어요. 위에서 사진 찍지 말라고. 거기서도 추방된 거에요.”

세월호 5주기를 며칠 앞둔 지난 12일 오후 전남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앞에서 전남 20개 시군의 드림오케스트라 1,000명 어린이 단원이 4·16합창단과 함께 추모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목포=연합뉴스
◇구원 또는 용서

오리지너 “세월호의 그림자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 거 같나요?”

김기중 기자 “다 똑같을 걸요? 평생 갈 것 같아요. 와이프에게 그랬어요, 안산 분향소 철거할 때는 꼭 가보겠다고. 그런데 못 가겠더라구요. 아직도 다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고, 이분들은 자식들을 못 구했는데 내가 아는 분들이라고 해서 떳떳하게 볼 수 있을까. 인사하고 올 자신이 없었어요.”

조원일 기자 “해마다 침몰 원인을 비롯해서 보도가 나오잖아요. 여전히 진실 규명을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을 보면 아, 나도 뭔가 바라고 있구나 하는 걸 느껴요. 정말 나쁜 놈 한 명만 밝혀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내가 하면 좋은데 난 능력이 안 되는 것 같고. 은연 중에 나의 잘못을 덮어줄 훨씬 더 나쁜 누군가가 나오길 바라는 거 같아요. 한때는 그게 유병언이기도 했고 전 대통령이기도 했었죠. 내가 한 잘못이 있어서 그게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말이에요. 이런 비겁한 희망과 불가능을 깨닫는 사이클이 앞으로도 반복될 거 같아요.”

김주성 기자 “저도 평생 가겠죠, 평생. 처음에는 잊어버리고 살자, 그랬지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멀어진 시민들과 조그만 접점이라도 찾으려는 노력 같아요. 우리 방식대로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고 들리는 방식대로 이해 해보자. 언론이 보여주고 싶은 방향대로만 보여주잖아요, 강요하고. 사람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해 보자, 그런 걸 해 보려고 지금도 노력을 해요.”

박소영 기자 “지난주 토요일 오후에 단원고 형제자매들이 하는 사진 전시회를 다녀왔어요. 참사 후에 단원고 학생들 기사에는 입에도 담기 힘든 악플이 달렸는데 경찰에 신고하는 일을 했던 실종학생 누나를 알고 지내고 있어요. 그 친구랑 형제자매들이 2년 전부터 사진을 배웠다고 하더라구요. 가서 인사를 하고 사진도 봤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세월호 당시에 카메라에 찍혔던 우리가 이제 카메라를 들었다.’ 저는 그 문구가 너무 좋았어요. 이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 주체성을 다시 스스로 찾겠다는 의지를 세상에 드러낸 거 같았거든요. 예전 같으면, 가족들을 보는 것마저도 힘들잖아요. 그런 마음이 느껴지니까, 제가 약간은 구원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주 조금은요. 세월호 기억은 평생 갈 텐데, 그래도 피해자였던 이들이 일상성을 회복하고, ‘아 드디어 되었다’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나도 구원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8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4ㆍ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이 연극 ‘장기자랑’을 무대에서 선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영상팀 한설이 PD

올해도 4월 16일이 옵니다. 뭔가 많은 게 바뀐 것 같았다가도, 아닌 것 같은 때도 많습니다. 그 해 목포와 진도, 안산에 함께 머물렀던 우리는, 아직 용서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도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계속 하겠습니다. 이상, ‘오리지너’ 였습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최한솔 인턴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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