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못 마시는 술이 당기는 날

입력
2019.04.13 04:4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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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아닐 거라고 믿던 날 외면하나~.’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읊조리는 인디밴드 노다이그런지의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와 달리 나의 경우 십중오륙, 나쁜 예감은 틀린 걸로 판명나지만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가끔 뒷목이 뻐근해질 때가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2월 말. 어느 대학교 구내서점에서 3만9,000원짜리 두툼한 학술도서를 다량 주문했다. 휘파람 부는 출고 담당자의 어깨 너머로 학교 이름을 본 순간 딸꾹질을 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담당자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어쩌면 왕창 반품될 수도 있으니 그 서점에 판매 가능한 최소 부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에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담당자는 절차를 밟아 출고 부수를 대폭 줄였다.

순전히 편견이었다. 6년 전, 늦여름이었다. 편집부로 걸려온 전화를 내가 받았다.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로 그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와 학과, 학번과 이름을 정확하게 밝혔다. 자신이 100명 넘는 1학년 과대표라고도 했다. 그가 전화 건 용건을 말했다. 자기네 과 학생들이 거의 다 듣는 2학기 교양필수 과목에서 교수님이 교재로 채택한 도서를 낸 출판사가 황소자리라는 거였다. “근데요~,”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가 계속했다. 어투가 어찌나 절절하던지 아들의 속내를 들어주는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하필 그 책이 이번 강의만 끝나면 우리가 읽을 필요도 없는 어려운 내용이라서요. 책값도 3만9,000원이나 하고요. 그래서 전화를 드렸어요. 죄송하지만 과대표인 저한테 한 권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학우들이 필요한 만큼 복사하고 나서, 책은 출판사로 다시 보내드릴게요.” 저런저런! 콩 타작하는 도리깨라도 된다면 ‘어차피 매일 쓰는 것도 아니잖아.’ 맞장구치며 흔쾌히 내어줄 수 있으련만. 이 책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수년간 몸 건강까지 상하며 고생한 저자를 지켜본 데다 수천만 원 제작비를 퍼부어가며 책을 만들어낸 당사자에게 이런 요구는 ‘내가 장정들 불러 네 곳간에 쟁여놓은 쌀가마니를 들고 갈 테니, 너는 그냥 손에 쥔 열쇠나 잠깐 빌려주면 된다’는 공갈로 들린다. 상대가 너무 천진난만하다 보니 정색하고 화를 내기도 난처했다. 그렇다고 길게 타이를 마음도 내키지 않았던 나는 책을 복사하려는 학생의 시도가 범법행위이며 출판사에 이런 전화를 거는 행동 역시 예의가 아님을 짧게 알려준 뒤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과대표로서 책임감이 지극하던 그 학생은 인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기어이 복사를 했으리라. 전화 이후 직거래든 도매상을 통해서든, 그 대학에서 구매한 흔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올 신학기에 맞춰 동일한 책을 주문한 곳이 하필 그 대학이었다. 담당자를 통해 출고부수를 조정한 뒤 나란 인간이 참 쪼잔하고 편협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다만 현실은 상상보다 잔인할 때가 많다. 3월 중순이 지날 즈음, 지난번 주문한 책을 전량 반품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해당 강좌가 폐강됐다는 사유가 붙었다. 심사가 잔뜩 꼬여버린 우리 담당자는 물류창고가 아닌 출판사로 책을 보내도록 한 뒤, 그 사이 찌그러지고 때가 묻은 책들을 골라내 증거사진을 전송하며 서점의 귀책사유를 묻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그때 내 호기심은 이상한 데로 향했다. 추측건대, 6년 전 교양필수 과목과 이번 강의를 개설했던 교수는 동일인일 것이다. 그 인문학자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소비자의 니즈를 읽지 못해 폐강까지 당한 데 자존심이 상할까, 아니면 제자들의 수준을 탓하며 좌절했을까? 그이가 누군지 알 수 있다면 이 추운 봄날 못 마시는 술이라도 실컷 사주고 싶은, 딱 그 마음이 간절해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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