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시를 쓰는 김혜순 시인, 새가 되어 날아왔다

입력
2019.04.11 18:00
수정
2019.04.11 19:0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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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김혜순 시인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늘 같은 꿈을 꿉니다/얼굴은 사람이고/팔을 펼치면 새”(‘날개 환상통’ 일부)

등단 40주년을 맞은 김혜순 시인이 새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돌아왔다. ‘죽음의 자서전’ 이후 3년 만에 낸 열 세번째 시집이다. 김 시인은 1979년 등단 이후 독창적 어법과 전위적 상상력으로 ‘한국 여성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라 불렸다. 시 72편이 실린 새 시집에서 그는 ‘날개 환상통’을 앓은 끝에 새가 되어 도시 하늘로 날아든다.

새가 된 시인은 “부리처럼 입술에 조개껍데기를 물고/ (…) 물고기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 바람의 손목을 두 손에 나눠 잡고/ (…) 도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증발한다”(‘쌍시옷 쌍시옷’ 일부). ‘새’는 ‘시인’이면서 ‘시’다. “시집들을 낱낱이 썰어버렸는데/나중에 문서 세단기 뚜껑을 열어보니 아예 거기 새들이 가득 앉아/한 줄 한 줄 글을 읽는 양 내 얘기를 하고”(‘새의 반복’ 일부)

김 시인은 새가 시와 시집의 ‘주제’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11일 전화로 만난 김 시인은 “시는 메타포(은유)가 아닌 수행이자 행위여야 하기 때문에, ‘새’는 시의 주제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행위로서의 시’를 김 시인은 2017년 펴낸 시론집 ‘여성, 시하다’에서도 역설했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시 하는 것’이다. 내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시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그녀를 찾아 헤매고, 꺼내 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2003년 한국일보 인터뷰)

사념 대신 생생한 여성의 몸을 불러 와 ‘시 하기’를 탐구했던 시인이기에, ‘새’가 되는 것 역시 곧 ‘새 하는’ 일이 된다. “소매 속에서 깃털이 빠져나오는/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새의 뺨을 만지며/새하는 날의 기록”이자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그 순서의 뒤늦은 기록”(‘새의 시집’ 일부)

날개 환상통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312쪽ㆍ9,000원

시집의 4부 ‘여자들은 왜 짐승이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에 실린 시 ‘중절의 배’에는 배(Ship)를 타고 네덜란드로 낙태 여행을 가는 여자들이 나온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플래카드를 들 여성들을 향해 남성들은 “떠나라”고 주먹을 흔든다. 공교롭게도 11일은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날이다. 김 시인은 헌재의 결정을 반색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게요, 여성의 몸을 누가 관리해 준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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