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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회>충무로의 기인 김기영 감독과 ‘하녀’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1960년대 초반 한국사회 중산층의 불안과 계층 갈등을 담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영(1919~1998) 감독은 희대의 기인(奇人)이었다. ‘화녀’(1971)의 촬영 때 구덩이에 쥐들을 몰아 불을 붙여 사방에 ‘불쥐’들이 도망가는 장면을 찍는가 하면, ‘충녀’(1972)를 준비하면서 쥐 50마리를 사육했고,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의 로케이션 헌팅 때 이틀치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심야영화관에서 잠을 청했다는 등 그를 둘러싼 풍문들은 일상적인 상식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일관된다.

허례허식이 없었던 그의 성격에는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일면이 있었다. 대학 후배였던 정일성 촬영감독은 지방에 촬영을 나갔을 때 여관 방문과 창을 잠그고 혼자서 몰래 고기를 구워먹는 김 감독을 보고는 배신감에 자리를 박차고 짐을 챙겨 서울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집으로 찾아온 김 감독은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사온 커다란 햄을 주면서 말했다.

“정형, 미안해, 난 몸집이 커서 고기를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 다 같이 먹을 돈은 없고...”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어도'. 한 신문기자가 외딴 섬을 찾았다가 맞이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담았다.
 ◇계보 없고, 교류도 없던 충무로 이단아 

영화의 보이는 부분에는 충분히 투자하지만, 나머지에 들어가는 비용은 철저히 절약한다는 것이 김기영 감독의 평소 지론이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는 특유의 구두쇠 기질은 필사적인 것이어서, 스태프는 촬영장까지 늘 시내버스로 이동했고, 운임이 싼 지게꾼에게 기자재를 맡긴 탓에 촬영 일정이 취소되는가 하면, 식사 때마다 값싼 음식점을 찾느라 혈안이 되기 일쑤였다.

김 감독은 충무로의 도제시스템이 키워낸 감독이 아니었다. 동시대의 어떠한 사조나 계보에 속해있지 않았고 영화계 사람들과의 교제도 드물었으며, 감독이면서 독립적인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제작자 역할까지 겸했다. ‘이어도‘(1977)와 컬트 괴작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1978)에 깃든 초현실주의적 상상력, ’육체의 약속‘(1975)에서 엿볼 수 있는 조명과 미술에 대한 수공예적 완벽주의, 인습을 거부하는 자유분방한 표현은 인디펜던트의 길을 고집한 작업방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예영화와 검열의 암흑기가 무색하게도, 김기영은 항상 김기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는 “미 공보원이 제작한 일종의 반공영화로 남원의 어떤 절에서 전사한 아들의 제사를 지내는 가족에게 국군 복장을 한 공산 게릴라가 찾아와 그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하면서, 제사를 둘러싼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이야기“(중앙일보 1990년 6월 17일자)였다고 한다. ‘슬픈 목가’(1960)까지 아우르는 초창기 작품 중 남아있는 건 리버티 뉴스(미 공보원 주도로 만들어진 뉴스영화)를 찍고 남은 자투리 필름으로 만든 단편 습작 ‘나는 트럭이다’(1953), 사운드가 소실된 ‘죽엄의 상자’와 결말 분량이 누락된 ‘양산도’(1955) 뿐이고, ‘십대의 반항’은 시나리오만 남아있다. 나머지는 전부 유실되어 전모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시기 작품에 대해 김기영 본인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로부터의 영향도 있었고, 또 당시 한국의 상황이 너무 비참했으므로 당연히 사실적 상황을 그렸다”고 말한다.

고 김기영 감독은 독자적인 제작시스템으로 당대 유행을 벗어난 괴작들을 만들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봉준호 “‘하녀’는 한국영화의 ‘시민 케인’” 

‘하녀’(1960)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대표작이자 중요한 변곡점이다. ‘살인의 추억’(2003)과 ‘설국열차’(2013)의 봉준호 감독이 “한국영화의 ’시민 케인‘(1941) 같은 작품”이라고까지 격찬한 이 작품은 김기영의 영화가 동시대 유현목(1925~2009)의 전통적 리얼리즘이나, 신상옥(1926~2006)의 유미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표현주의의 영역을 개척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하녀’의 출발점이 한 편의 실화였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신문 3면 기사에서 경북 금촌에서 식모가 주인집 아이를 저수지에 빠뜨려 죽인 사건을 접하고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아내가 친정에 간 사이에 가정부와 동침한 작곡가가 이상 성격의 가정부에게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내용인데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과 똑같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 비슷한 사건이 꽤 많았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에 따르면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인 1959년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해였다고 한다. 중소기업들이 잇달아 도산하고 경제가 불안해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기 집을 마련하고자 부동산 열풍에 휩쓸렸으며, 지방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층을 양산하던 혼란한 시대였다. 이때 서울에 상경한 여성들이 잡을 수 있는 일은 주로 직물공장의 여공 아니면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공장 직공들의 일상으로 열리는 도입부,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상황 설정은 시대의 세태를 고스란히 반영한 산물이었다. “인건비가 싸니까 죄다 식모를 두었지만 안방주인들은 속으로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시대다. 나는 2층집을 세트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곧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했다.” 근대적 욕망에 눈을 뜬 여성이 괴물적 존재가 되어 전근대적 가족질서를 해체하고 파괴한다는 치정극의 플롯은 이와 같은 사회적 맥락을 타고 형성되었던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는 한 중산층 집안에 하녀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의 한장면. 가장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중산층 집안은 해체 위기에 놓인다.
 ◇부인 관객들 흥분시켰던 ‘사실주의 영화’ 

오늘날 ‘하녀’는 한국영화의 클래식이자 심리주의 스릴러로 평가받지만, 정작 개봉 당시에는 동시대 상황을 정직하게 그린 사실주의 영화로 받아들여졌다. 김기영 감독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시대적인 배경, 시대 정서가 영화를 많이 결정한다. 그때 관객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러 온 부인들이 가정부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던지 영화를 보며 마구 일어나서 ‘저년 죽여라’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웃음).”

집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감독의 해석이 응축된 공간이다. 흑백TV와 피아노를 장만하고 카레라이스로 한 끼를 때우지만 벽에는 한국 전통의 탈이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와 함께 장식으로 걸려있고, 본 부인은 한복을 입는 등 전근대와 근대가 불균질하게 혼재된 집안의 풍경에는 묘한 긴장과 불안이 감돈다. 계단은 신분상승을 꾀하는 하녀의 욕망과 하층민으로 몰락할지 모른다는 주인 일가의 공포가 수직으로 교차하는 격전의 장소다. ‘전근대적 질서와 근대성의 충돌, 계급의 대립과 섹슈얼리티의 위협’으로 요약되는 김기영 영화의 주요 바탕은 ‘하녀’에 이르러 온전히 정립된다. 이후 감독은 ‘화녀’(1971)와 ‘화녀 82’(1982), ‘충녀’와 ‘육식동물’(1984)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배경을 달리하며 25년에 걸쳐 ‘하녀’의 인물과 이야기, 공간과 미장센을 끈질기게 변주하고 반복한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 김기영 감독의 동명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화제를 모았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는 전작 '하녀'를 밑그림으로 활용한다.
 ◇기인 거장의 기괴했던 최후 

‘죽어도 좋은 경험’(1990)을 창고에 박아두어야 했음에도 노장이 된 김기영은 만년까지 포기하지 않고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갖는 등 영화광들에게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은 그는 스스로 “마지막 걸작“이라 규정지은 ‘악녀’와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가족의 연대기 ‘아라리 전설’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악녀’의 시나리오는 ‘하녀’의 새로운 변주였다. 하녀와 중산층 집안의 대립은 간호사와 산부인과 의사 집안 사이로, 쥐약은 쥐 만두로 바뀌었고, 원장부인은 ‘충녀’를 상기시키듯 양계장을 하는 다른 남자를 만나 병아리를 잡아다 참새구이로 속여 판다. 이 ‘마지막 걸작‘은 김기영 평생의 모티브를 집대성한 역작이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1998년 2월 5일 새벽 3시경, 거장은 불길에 휩싸인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자택에서 여든을 목전에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두 차례나 노부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전력이 있는 곳임에도 ”그런 집일수록 나에게 어울린다“며 호기롭게 매입한 흉가였다고 한다.

‘하녀’는 한 편의 영화를 넘어서 한국 영화의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박쥐’(2009)는 김기영에 대한 박찬욱의 응답과도 같은 영화이다. 한복집이면서 사람들이 모여 마작을 하는 일본식 적산가옥, 신부를 통해 욕망에 눈뜨고 뱀파이어가 되는 태주(김옥빈)는 영락없이 ‘하녀’의 양옥과 하녀를 닮아있다. 임필성의 ‘마담 뺑덕’(2014) 또한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이 남자의 집안을 파탄낸다는 김기영식 치정극의 플롯에 기반하는 등 ‘하녀’가 후대의 한국영화에 끼친 영향과 흔적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어렵잖게 발견된다. 비록 김기영은 떠났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한국영화의 후대에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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