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낙태 선택권의 이면

입력
2019.04.11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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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성을 위해 현인이 사회를 철저히 통제하는 모델을 제시한 ‘국가’에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병약한 아이를 출산한 부모는 격리하도록 했다. 출산 허용 연령을 여성은 20~40세, 남성은 25~45세로 정해 이 나이를 지나 임신한 경우 중절하도록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지나치게 많은 자녀가 있는 가정의 중절에 찬성했다. 무제한은 아니었고 배아가 감각을 가질 것으로 추측한 수정 후 최대 90일까지는 허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대사회에서 낙태는 생명권보다 재산권(노동력)의 문제였다.

□ 초대 교회부터 개신교까지 기독교는 일관해 임신중절을 살인으로 규정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이슬람은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이외의 중절을 금지한다. 팔리어 불교경전에는 석가가 중절을 도운 승려를 추방토록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흐름은 20세기 들어 여성해방운동이 조직되면서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혁명 이후 러시아의 임신중절금지법 폐기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이를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영향도 크다. OECD 회원국 등 주요국에서는 “낙태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생명권 침해”라는 논리가 일반적이다.

□ 그러나 여성의 선택권과 생명권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 것인지 명쾌하게 알기란 여전히 어렵다. 나라마다 제각각의 사회적 합의가 있을 뿐이다. 그와 별개로 낙태로 여성이 겪는 극심한 육체적ㆍ심리적 고통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법화 이전 아일랜드 여성의 임신중절을 도왔던 네덜란드 NGO 자료를 토대로 한 논문에 따르면 이 단체의 도움을 받았던 5,650명 중 97%가 중절 선택을 잘 했다고 느꼈다고 한다. 70%는 중절 이후 해방감을 느꼈고 36%가 만족을 표시했다.

□ 하지만 반대로 1987년부터 13년간 핀란드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역학조사에서는 전년에 임신하지 않은 여성과 비교해 임신중절 여성이 이듬해 자살로 숨진 경우가 임신하지 않은 여성의 6배, 유산한 여성의 2배라는 연구도 있다. 임신중절 경험 자체가 여성에게 심각한 육체적ㆍ심리적 부담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낙태 선택권 논란과 무관하게 원하지 않는 임신은 가능하면 피하도록, 양육을 감당할 수 없는 임신은 출산 전 입양 제도를 통해 중절 선택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를 적극 강구할 필요가 있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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