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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섬유로 만들어 500℃ 열기도 견디는 방화복엔
뜨거운 화염ㆍ유독가스의 흔적 고스란히 남아
소방관들 “더러워진 방화복 바라보며 자부심 느껴”
소방관을 화마로부터 지켜주는 방화복에는 치열했던 사투의 흔적이 남는다. 2016년 이상훈 소방사는 새해 첫날 발생한 화재를 진압한 후 새까맣게 오염된 자신의 방화복을 촬영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지난해 11월 서울 충정로 KT 통신구 화재에 투입된 소방관의 방화복. 다량의 고무 연소 시 발생한 연기와 미세 화학물질로 인해 오염된 이 방화복은 내구연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불용(폐기)’ 처리됐다. 이상훈 소방사ㆍ고진영 소방위 제공
지난달 30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가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를 5시간 만에 진압한 후 쉬고 있는 이성우 소방사의 방화복이 새까맣다. 이 소방사 제공
지난해 11월 서울 충정로 KT 통신구 화재에 투입된 소방관들의 방화복. 심한 오염으로 인해 내구연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모두 ‘불용(폐기)’ 처리됐다. 고진영 소방위 제공

지난해 11월 서울 충정로 KT 통신구 화재 현장에 투입된 서대문소방서 소속 고진영 소방위는 진압 완료 후 자신과 동료들이 입고 있던 방화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원래 밝은 노란색 계통이던 방화복이 온통 새까맣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선 피복 등이 타면서 발생한 각종 미세 화학물질이 연기와 뒤섞여 방화복에 들러붙은 것이다. 세탁을 해 봤지만 오염물질은 제거되지 않았고 결국 전량 불용(폐기) 처리했다. 고 소방위는 “화재를 진압하고 나면 방화복이 더러워지기 마련이지만 통신구 화재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했다”라고 전했다.

특수 소재인 아라미드 섬유로 만들어 500℃의 열기를 견딜 수 있는 방화복은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소방관들에겐 필수 보호 장구다. 때문에 소방관과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화염과 유독가스의 흔적이 방화복에 고스란히 남는다. 까맣게 오염된 방화복은 소방관들에게는 자부심과 신념의 상징이기도 하다.

최근 지급 지연 사태로 인해 방화복 품질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지만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들은 자신의 방화복을 무한 신뢰한다. 믿지 않고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인터뷰에 응한 일선 소방관들은 방화복을 가리켜 전투를 함께할 ‘전우’ ‘갑옷’ 또는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아이언맨 슈트’ 등으로 표현했다. 서울 영등포소방서 소속 이성우 소방사는 “평상시 나약한 존재지만 방화복만 입으면 아이언맨처럼 특별한 힘이 생기는 것 같다”라며 “활활 타는 현장에서 달궈진 가스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업고 나오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방화복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전북 고창소방서 소속 이상훈 소방사는 “자신의 안전을 최종적으로 지켜주는 것은 방화복이 아니라 냉철한 판단”이라고 했고, 경기 김포소방서 소속 강도훈 소방사는 “방화복을 입는다는 건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뜻이므로 한 번이라도 덜 입고 싶다”라고도 했다.

화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진 주택이나 가연성 물질이 쌓인 공장, 지하 노래방, 고층 건물 등에서 방화복을 입고 불을 끄는 소방관의 모습은 익숙하다. 언제 닥칠지 모를 잠재적 위험과 싸우는 동안 소방수에 젖은 방화복은 점점 무게를 더해 간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일이 흔하지만 진화를 완료하고 방화복을 벗는 순간 밀려오는 뿌듯함은 소방관만이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5일 강원 고성군에서 소방차와 헬기를 동원한 산불 진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모 소방관 제공
5일 산불로 전소한 고성군 토성면의 한 명태덕장에서 방화복을 입은 김준효 소방교가 잔불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김 소방교 제공
4일 밤부터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산불 진화 작업을 시작한 소방관들이 6일 아침 천남리에서 휴식을 취하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이정규 소방사 제공
진화 도중 방화복에 기름때나 각종 화학물질이 묻을 경우 물세탁 전에 고압 세척기 등으로 초벌 세척을 해 주어야 한다. 강도훈 소방사 제공
방화복의 휴식 및 대기 장소는 소방차 곁이다. 다음 출동을 위해서다. 조모 소방사 제공

방화복을 벗은 그들의 휴식은 다음 출동 준비를 완료한 후에야 시작된다. 펌프차에 물을 채우고 호스 등 장비 세척, 공기호흡기 용기를 교체한 후 방화복을 세탁하는데, 기름때나 미세 오염물질을 제거하려면 에어건 또는 세차용 고압 세척기를 이용한 초벌 세척이 필수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방화복에 새긴 훈장”이라고 서울 성북소방서 김준효 소방교는 표현했다. 세탁을 마친 방화복은 다음 출동에 대비해 소방차 곁에 널어 말린다.

열을 견디기 위해 두꺼운 겉감과 내피로 이루어진 방화복은 입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다. 여름철엔 입고만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탈진도 잦다. 강원 강릉소방서 소속 이정규 소방사는 “공기 호흡기와 각종 개인 장구까지 착용하고 진화 작업을 하고 나면 몸무게가 1~2㎏씩 줄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불편이야 소방관으로서 감내할 부분이라지만 방화복의 내구성이 떨어지고 수선조차 원활하지 않은 현실은 납득이 어렵다. 조모 소방관은 “진화 활동을 하다 날카로운 부분에 걸리면 겉감이 찢기기 일쑤지만 수선이 제대로 안 되고 그렇다고 불용 처리나 추가 지급도 쉽지 않아 직접 꿰매든가 선배한테서 여벌을 얻어 입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여성 소방관들은 뻣뻣하고 무거운 방화복보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더 불편하다고도 털어놨다. 경북 지역에서 근무하는 홍모 소방사는 “작은 체구의 여성이 방화복을 입은 모습을 보며 안쓰러워하는 시민들도 있고 소방관 중에도 여성을 배려해 힘든 작업에서 제외하기도 하는데 나는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여성 소방관들은 현장에서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 4시간에 걸친 화재 진압 작업을 마친 한상우 소방사가 촬영한 자신의 방화복(왼쪽)과 신입 소방관인 노수용 소방사가 지난 3월 화재 현장에 처음 투입된 직후 촬영한 자신의 방화복. 한 소방사ㆍ노 소방사 제공

최근 강원 산불을 계기로 소방관의 처우 개선과 국가직 전환을 요구하는 여론이 크게 일고 있는 데 대해 조모 소방사는 “몇 년 전 소방관들이 장갑을 사비로 사서 쓴다는 얘기가 알려지자 장갑만 여러 벌 지급한 경우도 있다”라며 “국가직 전환을 통해 노후 장비 교체와 처우 개선이 제때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진영 소방위는 “열악한 장비나 처우보다 임무 수행 중 당한 사고나 질병에 대한 보상 절차를 개선해야 한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현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소방관의 숙명을 국가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성우 소방사는 “소방관이 불쌍하다는 인식보다는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근무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지금처럼만 응원해 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방화복의 휴식 및 대기 장소는 소방차 곁이다. 다음 출동을 위해서다. 이상훈 소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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