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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산파일기 179년 후 재해석, 엄마 자서전 쓰기와 닮아

“하인스씨 집을 지나자마자 내 앞에서 큰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바람에 말이 놀라 튀어 오르며 뒷걸음질쳤으나 목숨을 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자비로운 신의 가호. 하인스씨 도움으로 쓰러진 나무를 건넜다. 계속 갔다. 얼마 안 있어 시내가 나왔다. 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휴인스씨가 고삐를 잡고 시내를 건너며 말을 끌었다. 이번에도 전능한 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너, 아무 탈 없이 도착했다.”

한 산파(産婆)가 산기가 있다는 이웃의 소식에 물길을 뚫고 어렵게 목적지로 향하는 장면을 기록한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일기의 주인공은 마서 무어 밸러드.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 할로웰에서 27년간 816명의 아이를 받아낸 베테랑 산파였다. 그의 일상은 꼬박꼬박 일기를 써왔다는 것 외에는 얼핏 특별해 보이지 않는 생활로 가득했다. 특히 권력이나 주요 직위를 중심으로 기록되는 역사의 관점에선 그랬다. 그가 생을 마감한 1812년 6월 2일에 조차 지역 신문에 실린 부고는 그를 비단 누군가의 부인으로 짧게 기록할 뿐이었다. “이프리엄 밸러드씨의 배우자 마서 부인, 오거스타에서 사망. 향년 77세.”

이러한 마서가 돌연 역사의 전면으로 소환된 때는 사후 179년이나 지난 1991년이다. 뒤늦게 발견된 마서의 일기는 1991년 최고의 역사 저작물에 시상하는 뱅크로프트상과 퓰리쳐상(역사부문)수상작이 될뿐더러 미국의학사학회상, 뉴잉글랜드 역사학회상 등 8개의 상을 휩쓴다. 미 공영방송 P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국내에선 ‘산파일기’ (A Midwife’s taleㆍ동녘 발행)로 2008년 번역 출간된 책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산파일기’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거시사(巨視史)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인류의 절반, 즉 여성의 삶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자, 뒤늦게 그 가치가 재발견된 텍스트의 전형이다. 개인의 일기가 곧 역사기록으로 자리매김한 대표사례이기도 하다.

1735년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마서가 1785년부터 자신이 사망한 1812년까지 총 27년간 기록한 일기가 ‘역사 기록’으로 거듭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당시 뉴햄프셔 대학 교수이자 초기 미국사 연구자였던 로럴 대처 울리히다. 마서의 고손녀 메리 호버트가 메인주 주립도서관에 기증하고, 다시 도서관 사서가 필사한 이 일기를 울리히가 발견해 분석에 나섰던 것.

얼핏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기록이었지만, 울리히는 그 안에서 기존 역사 서술이 배제한 하층 계급, 여성의 삶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실제 마서의 일기에는 그 어디에도 담겨 있지 않은 생생한 미시사(微視史)의 장면들이 넘쳐났다. 태어날 아이의 친부를 확인하기 위해 산모가 산고의 고통을 겪을 때 집요하게 ‘애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는 사람들의 행태나, 강간 혐의를 받던 판사가 미심쩍게 무죄를 받는 과정이나, 직물을 짜는 일을 하는 일상 등. 모두 당시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특히 다들 잠든 추운 겨울의 새벽, 위험을 무릅쓰고 얼었다 녹았다 하는 강을 건너 아이를 받으러 이웃집으로 향하는 마서의 모습은 울리히의 해설과 만나 그가 얼마나 큰 사명감으로 자신의 일에 임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 대목으로 기억된다. 울리히가 맥락과 해설을 부여하면서, “이프리엄 밸러드씨의 배우자”로만 남을 뻔한 마서는 존경 받는 산파이자, 전문 직업인이자, 역사의 목격자, 주요 역사기록의 저자로 기억된다. 울리히는 이후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가 됐다.

기록활동가이자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이야기나무 발행)의 저자 안정희 북 큐레이터는 “어떤 기억이나 기록은 발견, 재해석을 만나야 비로소 가치가 부여돼 빛을 발하기도 하는데 특히 여성들의 기억과 기록이 그런 경우가 많은 듯하다”라며 “산파일기가 재해석된 것도, 엄마의 자서전 쓰기가 곳곳에서 이뤄지는 것도, 어찌 보면 과거엔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던 여성의 삶과 노동에 가치를 불어넣고 이를 기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다”고 설명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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