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바다 위의 청년들

입력
2019.04.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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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복무 중 승선근무예비역이라는 제도가 있다. 군입대 대상자 중 항해사ㆍ기관사 면허 소지자를 배에 승선근무하게 하는 대체복무 제도다. 면허가 있어야 대상이 되기 때문에, 관련 업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본 적이 많지 않을 것이다. 1년에 1,000명을 선발하고, 한 해 복무 중인 사람은 3,200명 정도다.

승선근무예비역의 신분은 일단 민간인이다. 선박관리회사 같은 민간기업과 근로계약서를 쓴다. 이 점에서는 산업기능요원과 비슷한데, 배를 탄다는 업무 특성상 출퇴근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한번 배를 타면 대략 반년 이상 퇴근하지 못하는 선상이라는 일터에서 근무한다.

현역복무와는 복무기간 차이가 크다. 승선근무예비역의 복무기간은 36개월이다. 지금 육군 복무기간은 21개월이고, 내년 6월 15일부터는 18개월로 줄어드니, 이제 현역의 딱 두 배가 되는 셈이다.

대체복무 제도를 전반적으로 폐지하고 현역 복무 조건을 개선하고 있는 정책 방향에도 불구하고, 승선근무예비역에는 아직 충분한 관심이 닿지 못한 것 같다. 대상자가 적고 특수한 직종이기도 하지만, 군복무 중인 승선근무예비역들이 대부분 배를 타고 있어 아예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탓도 클 것이다. 현역 복무라도 휴대폰을 쓰고 인터넷 서신을 보내고 면회 온 지인들을 만난다. 산업기능요원이나 사회복무요원들은 출퇴근을 한다. 사업장 근로감독도 형식적으로나마 가능하다.

그러나 승선근무예비역은 배를 타고 바다 너머로 사라진다. 사업장과 노동자 모두가 감시감독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그 결과, 승선근무예비역은 모든 군복무자 중 가장 고립된 청년들이 된다.

작년 3월, 한 승선근무예비역이 사우디아라비아 근처 바다에서 목을 매 숨졌다. 유서에는 도저히 괴롭힘을 참지 못하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작년 8월, 다른 승선근무예비역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스텔라데이지호에도 거의 보도되지 못한 승선근무예비역이 두 명 타고 있었다. 대체복무 중이던 청년들의 소식은, 심지어 죽음조차도, 바다를 넘으며 흩어진다.

얼마 전 병무청의 승선근무예비역 제도개선 실적 자료를 열람했다. 제도개선 실적 중 “지방병무청 ‘권익보호상담관’ 지정 및 고충상담”이 있었다. 자그마치 4명이나 상담을 했다고 한다. 0명이 아니라니 놀라운 성과다. 인권침해 피해 신고요령을 작년 한 해 자그마치 893명에게 교육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성과이고 실로 획기적인 제도개선이다. 다시 말하는데, 승선근무예비역 복무자는 3,200명이다. 아참, 해운회사 관계자들에게 인권교육을 하고 보도자료도 배포했다.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일해 본 적도, 일할 일도 없는 중장년 남성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라운드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아주 멋진 사진도 나왔다. 인권교육이 아주 잘 이루어져 다시는 인권침해 사고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을 본 다음에도 나는 승선근무예비역 사망사고 제보를 몇 건이나 더 들었다.

병무청은 작년 3월 사망사건의 진행경과를 묻는 국회 의원실의 질의에 “해운업체와 유족 간 유족 보상금 합의 중”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유족들은 보상금 합의 중이 아니다. 합의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작년 여름이었다. 병무청이 유족에게는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사측 말대로 보고서를 쓴 것이다.

국가가 이런 애당초 인권침해 위험이 높은 제도를 방치하는 사이 어떤 청년들은 망인이 된다. 어떤 가족들은 큰 슬픔을 안고 조용히 침잠한다. 어떤 유족들은 투사가 된다. 어떤 청년들은, 바로 오늘도, 선임이 너무 괴롭혀 죽고 싶은데 벗어날 수가 없다는 호소를 띄엄띄엄 보내온다.

군 입대를 흔히 국가의 부름이라고 한다. 국가는 청년들을 불러들이지만, 부름을 받은 이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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