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재난 현장의 정치인

입력
2019.04.08 18:00
수정
2019.04.08 18:0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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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를 할퀴고 지나간 다음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될 이유는 넘쳐났다. 너무 이른 감이 있고, 경호와 안전을 위해 구호 현장 인력을 빼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에어포스원에서 피해 지역을 내려다 보는 걸로 대신했지만, 그 모습이 보도되자 피해 주민과 대통령의 거리감은 하늘과 땅만큼 멀어졌다. 부시는 이후 뉴올리언스를 13차례나 찾았지만 주민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정치인이 재난 현장에 가지 않았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 준 사례다.

□ 회고록 ‘결정의 순간’에서 부시는 “카트리나 피해자들에게 조국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고 후회했다. 재난 현장을 방문해도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문제는 커진다. 감동도 공감도 없는 현장 행보는 정치놀이에 불과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참사 다음날 팽목항을 찾았지만 유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1주기 때는 헬기로 팽목항을 잠시 들른 후 명분도 의심스러운 남미 순방을 떠났다. 대통령이 없는 서울은 세월호 격전장이 됐고, 유족들 마음도 영영 떠났다.

□ 강원 산불을 계기로 재난 현장에 정치인 방문이 도움이 되느냐가 다시 논란이다. 소방관들이 현장 업무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말아달라고 호소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현장 방문은 종종 민폐를 끼치곤 한다. 2000년 첫 구제역 발생 당시 한 도지사가 헬기로 현장 방문을 하려 하자 김성훈 농림부 장관이 헬기를 추락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막은 적이 있다. 아무리 지역구 방문이라지만 프로펠러 바람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면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여야 대표의 현장 방문도 대동소이했다.

□ 그래도 국민이 고통받는 현장을 찾아 소통하는 일은 필요하다. 피해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을 통해 보여주려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양면적 성격이 있는 재난현장 찾기에서 문제점만 도드라지는 건 정치인들의 개념 없는 행보 탓일 게다. 주민들을 위로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할 정치인이 의전이나 받는다면 주민들과 멀어질 뿐이다. 요즘 정치권에는 전과 달리 현장 방문 시 불필요한 인원을 제한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고 한다. 이참에 정치인의 재난현장 방문 매뉴얼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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