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사파타의 아얄라 강령(4.10)

입력
2019.04.1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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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기 멕시코 북부의 판초 비야와 함께 남부를 장악한 에밀리아노 사파타. 그의 아얄라 강령은 혁명 이념이자 구호였다.
혁명기 멕시코 북부의 판초 비야와 함께 남부를 장악한 에밀리아노 사파타. 그의 아얄라 강령은 혁명 이념이자 구호였다.

‘아얄라 강령(Plan of Ayala)’은 멕시코 혁명기인 1911년 남부 모렐로스주의 혁명군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9.4.10)가 아얄라에서 선언한 혁명의 핵심 이념이자 공약으로, ‘토지(자립)와 자유(자결)’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옛 제국주의 지배자들과 그 권력에 결탁한 대농장주들이 사실상 강탈해 간 원주민ㆍ농민 토지의 재분배를 원했고, 중앙 정부(식민지 정부)나 권력자의 간섭 없이 토지를 기반으로 자생력을 갖춘 전통 농촌사회의 복원을 추구했다.

총 15조인 강령의 제7조는 “대농장주 토지 및 재산의 3분의 1은 토지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이들에게 재분배한다.(…) 우리는 그들이 강탈한 토지와 산, 물이 시민 모두의 소유임을 확인한다”이고, 8조는 “그에 불응하는 농장주는 나머지 3분의 2의 재산도 잃을 것이다. 그 재산은 국유화해 전쟁 피해 복구와 미망인ㆍ고아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들과 같은 옷과 모자(솜브레로)를 쓰고, 상류층의 스페인어가 아닌 그들과 같은 언어로 말하는 ‘혁명 지도자’에게 농민ㆍ원주민들은 열광했다. 멕시코 북쪽에 전설의 혁명전사 판초 비야(Francisco Villa, 1878~1923)가 있었다면, 모렐로스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중남부는 단연 사파타의 영역이었다.

디아스(Porfirio Diaz) 정권의 친외세ㆍ친지주 정책에 맞서 1910년 시작된 멕시코 혁명은 지주 출신 자유주의 정치인 마데로(Frnacisco Madero)와 판초 비야-사파타 연합을 통해 추진됐다. 1911년 디아스가 축출됐지만, 사파타가 희망하던 토지개혁은 이뤄지지 않았고 2년 뒤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의 군사쿠데타로 반혁명 정부가 서면서 다시 내전을 치러야 했다. 비야-사파타 농민혁명군은 지주ㆍ민족자본 진영의 카란사-오브레곤(Alamos Obregon) 입헌파에 의해 1917년 패배, 멕시코 혁명도 사실상 끝이 났다. 비야는 암살당했고, 사파타는 정부군의 음모에 속아 피살됐다.

전설의 게릴라 판초 비야와 달리 사파타는, 비록 국가나 권력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낭만적ㆍ무정부주의적 리더였지만, 민중의 이해를 하나의 구호로 묶을 줄 아는 혁명 지도자였다. 그 정신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으로 이어졌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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