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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장애인식 개선
[저작권 한국일보]장애인은 도와야 할 불쌍한 사람일까요. 김경진 기자
편견에 기반한 동정ㆍ혐오 모두
자기만족에 불과한 폭력과 같아

장애인은 불쌍하니까 도와야 할까? 정답은 ‘X(엑스)’다. 불쌍한 장애인이 옆에 있어도 돕지 말고 그냥 못 본 척하라고? 얼핏 동정심도 배려심도 없는데다 이타심의 ‘이’자도 모르는 심성 고약한 이들이나 할법한 말 같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달리해 보면 이전과는 다른 것이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 인생 최고 몸무게를 경신 중인 요즘의 나는 계단 오르는 것이 힘겹다. 그런 내가 몇 계단 오르고 나서 숨이 차 헉헉댔더니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이 도와주겠다며 뒤에서 내 등을 민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그의 배려와 인정에 감사한 마음이 들까? 그렇지 않다. 일단은 놀랄 것이고 곧이어 허락 없이 내 신체에 손을 댄 사실에 화가 날 것이며, 무엇보다 묘한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그 청년은 나를 ‘뚱뚱한 아줌마’로 판단한 뒤 ‘뚱뚱하면 계단을 오르기 힘들다’고 멋대로 나를 재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살찌기 전보다 힘들긴 하겠지만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의지로 계단을 오를 것이다. 10대 여고생들에 비하면 몇 배의 시간이 걸릴지라도 ‘계단 오르기’라는 작업을 끝까지 수행해 내고야 말 것이다. 청년의 도움은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내가 먼저 요청할 일이다.

장애인이라고 다를 것 없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장애인에게 내 멋대로 도움을 주려는 건 상대방을 진정으로 배려하지 않은 자기만족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길 가다 지나치는 사람에게 “당신,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요”라며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이 4월이라서다. ‘세계 자폐인의 날(4월2일)’과 ‘장애인의 날(4월20일)’이 한 데 있는 4월은 한 달 내내 ‘장애인의 달’ 같은 느낌이다. 장애 관련 행사와 교육 등이 봇물을 이루고, 미디어는 앞다퉈 장애 관련 특집 기획을 준비한다. 그리고 각 학교에선 장애 이해 교육이 실시된다.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반짝이나마 치솟는 바로 이때야말로 우리가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 안의 시각을 점검해 봐야 한다. 자칫 잘못된 접근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만 공고히 한다. 그 편견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장애인들은 세상에 나오기가 더 힘들어진다. 우리의 시각이 장애인을 거리에서, 세상에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이유

미디어에선 신문, 방송할 것 없이 장애인을 ‘아이템’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보다 멋진 성과를 이뤄낸 ‘성공 신화’를 조명하거나,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들고 불쌍한데 그래도 꿋꿋하게 산다며 ‘감동 신화’를 일궈 내는 데 익숙하다.

아니면 장애 관련 ‘뉴스거리가 될 만한’ 사안이 있을 때 반짝하고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데, 그나마도 겉으로 드러난 ‘사건’과 그 사건에 대처하는 ‘권력’을 다루는 데만 매몰돼 정작 당사자인 ‘장애인의 삶’은 안중에 없다.

대중성을 지닌 미디어의 힘은 막강하다. 현실에서 장애인을 자주 접할 수 없는 비장애인은 미디어를 통해 장애 인식을 형성해 간다. 아마도 대중적인 장애인식은 10년 전의 내 장애인식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장애인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봉사도 하겠지만 그들이 내 삶에 가까운 관계로 엮이는 건 싫은, 딱 그 정도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장애인식이 아닐까.

고백하자면 내가 그랬다.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내 자식이 발달장애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하고 살아도 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먼 나라 남의 일인 줄 알았던 장애가 내 일이 되고 나니 그제야 나의 장애인식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왜 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본 적 있는가? 그나마 전동휠체어가 보편화하면서 지체장애인은 자주 만날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거리에서 발달장애인을 만나는 건 낯선 일이다. 나 또한 10년 전까지는 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의 엄마가 된 지금은 거리에서 장애인, 특히 발달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 그 이유를 안다. 꼭 이 하나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시선이, 모두의 편견과 오해가 발달장애인을 거리에서 내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봉사는 하겠지만 내 삶에 엮이는 건 싫다.’ 바로 그 지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세상은 모두와 얽혀있는 공동체다. 그런 공동체의 대다수 장애인식이 원거리에서의 봉사만 원할 뿐 직접적인 관계 맺기는 거부하니 장애인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게 힘이 든다. 그러다 보면 비장애인도 장애인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다. 모두의 평범한 장애인식이 ‘공존’이라는 당연한 일도 당연하지 않은 특별한 일이 되게끔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대상화

이러한 장애인식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대상화하고 있기에 형성된다. 대상화란 어떤 존재를 하나의 틀로만 규정해 버리는 걸 말한다. 즉, 장애인을 장애인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살이 쪘다고 해서 ‘뚱뚱한 아줌마’라고 대상화해 버리면 사람들은 나를 게으름, 무기력, 의기소침 등의 부정적 이미지에 가두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상화한 채로 나를 대했다간 얼마 안 가 큰 코 다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활동하고 의욕에 차 넘치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을 잘 살고 있는 당당한 중년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살이 쪘을 뿐이다. 살이라는 요인이 나라는 사람의 전체를 규정하진 못한다.

마찬가지다. 시험 점수로 한 학생의 전체를 규정할 수 없고, 사회적 직위로 그 사람의 전체를 평가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유독 장애인을 대할 때는 모두가 이 부분을 놓치곤 한다.

장애인은 장애인이니까… 불쌍해 하거나 동정하거나 때론 혐오한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니 무조건 도와야 할 것 같고, 동정하니까 선의를 베푼다. 그러나 이때의 선의는 동등한 존재로서의 지원이나 도움이 아닌 위에서 밑으로 하사하는 자기만족이다. 그리고 혐오. 밑도 끝도 없는 혐오. 장애인의 88.9%가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됐고, 사람으로 태어나 사는 이상 장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는 누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는 이 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

장애가 한 사람의 전체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 알고는 있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강력히 뿌리내려 있음을 아는 것이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방송에서 인지능력이 낮은 사람들을 콧물 흘리는 분장을 한 ‘바보’로 취급하며 웃겨대는 사회다. 인지가 두세 살 수준에 머물러 있고 앞으로 ‘동네 바보 형’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르는 아들을 보며 갈 길이 멀었다고 한숨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기에 앞서 ‘사람’”이라는 말을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강조해 왔다. 아들을 키우면서 겪은 많은 문제가 아들이 장애인으로 대상화될 때 발생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비장애인 딸이라면 겪지 않을 여러 일과 사건들을 아들은 단지 장애인이기에 겪어 왔다. 그러한 일은 가정 안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와 사회에선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아들도 사람이다,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 내가 사람이듯이, 단지 살이 쪘을 뿐인.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다시 아들을 장애인으로 바라보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다.

‘장애인의 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4월이 지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반짝 관심이 치솟는 이때가 기회다. 그동안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대하고 싶은지 1년에 한 번이라도 좋다. 지금이라도 한 번쯤 성찰해 보는 건 어떨까? 단 한 번이라도 알게 된 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알게 된 자’들이 하나둘 늘어가면 그 사회는 장애인에게만 좋은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 그 사회는,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우리의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류승연 작가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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