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박근혜 취향 맞춰 문건 작성 지시” 전 직속 후배 판사마저 등돌린 사법농단

입력
2019.04.02 17:36
수정
2019.04.02 22:39
10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농단 의혹 재판에 출석한 현직 부장판사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지시에 따라 문건을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사법농단 관련해 현직 법관이 증인석에 선 것은 처음이다.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는 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부장 윤종섭) 심리로 열린 임 전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 부장판사는 2013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에서 기획조정심의관으로 근무했다. 기획조정심의관의 직속상관은 기획조정실장이고, 당시 기조실장은 임 전 차장이었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관련 검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등 재판거래 의혹 문건들을 작성했다.

이날 법정의 증인석과 피고인석에서 각각 서게 된 예전의 직속 선ㆍ후배 법관은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지시로 문제의 문건들을 작성했다고 인정했다. 또 “사법부 권한을 남용하는 내용이 많이 포함됐고, 비밀스럽게 작성해 부담을 느꼈느냐”는 검사 질문에도 “그렇다”고 답했다. “심의관들이 본연의 업무를 했을 뿐 ‘의무 없는 일’은 하지 않았다”며 직권남용 혐의를 부인해 온 임 전 차장 측 주장과는 상반되는 진술이다.

특히 문건 작성엔 임 전 차장의 구체적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독대를 앞두고 있던 양승태 대법원장을 위해 생산된 문건에 대해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정부ㆍ여당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판결 자료를 뽑아달라고 지시했다”고 털어 놓았다. 이 문건의 제목인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 ㆍ잘못을 바로잡아 고침)’ 또한 “박 대통령이 좋아할 만한 문구로 임 전 차장이 직접 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교조 법외노조 문건’에 대해서는 “임 전 차장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면, 심의관이 그것을 문서의 형태로 작성했다”라 설명하며 자신의 일이 “일종의 납품 형태”라고 말했다.

불리한 진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임 전 차장은 검찰 측 질문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증인신문 전부터 형사소송법 조항을 꺼내 들어 “유도신문을 막기 위해 재판장이 소송지휘권을 적극 행사해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신문 내내 검찰이 준비한 질문들에 대해 적절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한편, 이날 재판부는 임 전 차장 사무실에서 확보한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증거로 채택했다. 앞서 임 전 차장 측은 검찰의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USB라 증거로 쓸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압수수색 절차에 문제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해당 USB에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 8,600여건이 담겨 ‘사법농단 의혹의 스모킹 건’이라 불렸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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