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소외되고 있는 소외질병 희생자들

입력
2019.04.02 04:40
29면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의 홍역 집단발생은 “감염병을 예방하는 것은 백신이 아니라 백신접종이다”라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홍역 백신을 한 번도 접종받지 않은 사람이나 권장되는 2회 중 1회만 접종한 사람들에서 대부분 발생한 것이다.

홍역과 마찬가지로 여타 소아 질병에는 효과적인 백신이 있다. 이들 소아질병 백신은 지난 10년간 총 2,500만여명의 어린이 사망을 예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백신의 효과가 아직까지 ‘열대성 소외질병(neglected tropical diseases)’이라는 특정 질병군에서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명확히 할 것은 이들 감염병은 한국이나 영국 등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나라에서만 ‘소외’된다는 점이다. 한국에는 A군 연쇄상구군(GAS)이라는 세균을 들어본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이 균은 가장 심각한 형태의 인후염을 일으켜 세계적으로 매년 최대 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3개 질병을 ‘소외된’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질병의 심각성에 대한 세계보건당국의 명확한 기준은 없다. E형 간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연간 7만명(가장 흔히 인용되는 WHO의 추정치)인지 1만명인지(빌앤멀린다게이츠재단이 지원하는 보건계량평가원(IHME)의 추정치)도 불확실하다.

이들 질병이 선진국에서 흔히 발생한다면 백신과 진단키트, 치료제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기업 인센티브가 있을 것이다. 질병 전파 경로 등을 파악하고, 효과적인 예방 및 통제 방안을 시행하기 위한 연구비 등이 제공될 것이다. 매년 세계적으로 10억달러(1조1,000억원) 이상이 열대성 소외질병 관련 연구에 사용된다. 하지만 그 중 80% 이상은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등에 사용되며, 여타 소외질병에 대한 예산은 미미하다. 일례로 2016년에 GAS 백신 연구비는 100만달러(약 11억원)에 불과했다.

국제사회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문제가 되는 로타바이러스와 자궁경부암에 대해 우수한 백신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달리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 더 큰 문제가 되는 질병들에 대한 신규 백신을 개발할 수는 없을까. 기업 입장에서는 신규 백신의 개발에 5억~10억 달러가 소요될 수 있다. 이 투자는 폐렴 백신의 경우 수익성이 담보될 수 있지만, 하루 수입이 1달러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질이나 GAS로 인한 패혈성 인두염에는 그렇지 못하다. 백신 후보 10개중 1개만 상용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신 개발 인센티브의 부족은 개발 실패의 위험을 더욱 가중시킨다.

소외질병 환자들이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리더십과 지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이들의 대변자가 필요하다. 한국은 지난해 빌게이츠재단, 5개 한국 제약기업과 함께 글로벌헬스기술연구기금(RIGHT)을 출범시켰다. 이 기금은 연간 800만달러(90억원)를 소외질병에 대한 백신, 치료제, 진단약 개발에 지원한다. 좋은 출발이지만, 개발에 수반되는 많은 비용과 위험성을 고려할 때 크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메르스와 홍역에서 실감했듯이 바이러스에게는 국경이 없다. 한국의 정책관리자와 정치가, 기업인과 자선기관들이 함께 나서서 지구촌의 소외되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문제점도 알고 해결책도 있다. 한국이 이를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롬 김 국제백신연구소(IVI)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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