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이슬람 세계 “서유럽의 침략” 십자군 전쟁을 달리 봤다

입력
2019.03.30 04:40
19면

 

 <8> 십자군 전쟁, 정말 종교 전쟁이었나?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매주 들려드립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

십자군 전쟁은 1096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충돌한 가장 대표적인 종교 전쟁 사례로 역사책에 소개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십자군’이란 표현은 유럽인들이 만든 용어고, 이 말이 유럽 사료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200년대 중반 이후였다. 그렇다면 또 다른 당사자였던 이슬람 세계는 이 전쟁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그리고 과연 이슬람 세계는 이 전쟁을 종교 전쟁으로 인식하기는 했을까. 이집트의 파티마조와 아윱조가 십자군과 군사 동맹을 시도한 사례는 십자군 전쟁을 단순히 종교 전쟁으로만 단정 짓기 어렵게 만든다.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불린 십자군 전쟁 

십자군 운동은 1095년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우르바누스 2세에게 십자군 전쟁 선포 빌미를 제공한 것은 셀주크 투르크의 등장이었다. 셀주크 투르크는 1071년 비잔티움 제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소아시아 전역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를 계기로 서유럽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예루살렘 성지 순례객을 위협하고 과도한 통행세를 부과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때 교황은 클레르몽 연설에서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교회를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강조한 후, “나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 이 여정에 참가한 이들에게 사면을 허락합니다”라는 말로써 이 전쟁이 거룩한 성전(聖戰)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역사가는 과연 십자군 전쟁을 그리스도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종교 전쟁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교황에게는 유럽 전역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개인적 야욕이 숨어 있었고, 전장에 나간 유럽의 귀족과 왕족에게는 중근동 지역에 새로운 영지를 개척하려는 세속적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쟁 당사자였던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전쟁이 성전이라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이 전쟁이 단순히 ‘이프란즈(Ifranj)의 침략’이라는 용어로 불렸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프란즈는 아랍어로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을 가리키는데, 로마제국 멸망 직후 서유럽 일대를 다스렸던 프랑크 왕국(481~843)의 이름이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면서 서유럽인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통용되고 있었다.

 이집트의 파티마조, 경쟁자였던 셀주크 투르크 견제 위해 십자군에 동맹 제안 

이슬람 세계에서 십자군 전쟁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 전쟁으로 확고하게 인식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시기부터 발견된다. 십자군 원정대는 두 세기 동안 모두 7차례 결성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제1차 십자군 전쟁뿐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대는 1097년 5월 니케아를 함락시킨 후 에데사와 안티오크를 연달아 격파했고 1099년 6월 7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집트의 파티마조가 같은 이슬람 세력이었던 셀주크 투르크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군에게 군사 동맹을 제안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안티오크 성채를 함락시키는 십자군을 묘사한 15세기 세밀화
안티오크 성채를 함락시키는 십자군을 묘사한 15세기 세밀화

이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이슬람 세계 내부의 복잡하게 얽힌 세력 다툼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11세기 무렵 이슬람 세계의 중심 국가는 바그다드의 칼리파 제국이었던 압바스조(750~1258)였다. 하지만 압바스조는 이미 쇠퇴해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셀주크 투르크가 신흥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원래 아시아 내륙 출신의 유목민이었는데, 압바스조 치하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다 점차 막강한 무력을 쥔 군벌 세력으로 성장하게 됐다. 1055년 셀주크 투르크는 압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그들의 지도자는 칼리파로부터 ‘술탄’이란 칭호를 수여 받았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파티마조(909~1171)라는 또 하나의 신흥 세력이 등장해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더욱 가중시켰다. 파티마조는 압바스조의 공식교리였던 순니파와 대립되는 시아파를 채택한 후 스스로 칼리파 국가임을 선포했다. 파티마조를 견제하기 위해 셀주크 투르크는 압바스조 칼리파와 순니파 교리의 수호자임을 국시로 내걸었다. 결국 두 신흥 세력은 시리아와 예루살렘 인근 지역을 경계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됐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엉뚱하게 십자군이라는 변수가 외부에서 등장한 것이다.

파티마조는 니케아, 에데사, 안티오크 등에서 셀주크 투르크 군대를 무찌른 십자군에게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의 역사 문헌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직전인 1098년 초 무렵 파티마조의 사절단이 안티오크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던 십자군 진영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계기로 파티마조와 십자군은 셀주크 투르크 격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 예루살렘 관할, 순례객 안전 보장 등을 놓고 수개월 동안 협상을 벌였다. 비록 양측의 군사 동맹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파티마조가 십자군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봤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파티마조에게 십자군은 이슬람 영토를 침범한 이교도 군대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부의 적대 세력을 제거하는데 쓸모 있는 동맹 후보자쯤으로 비쳤던 것은 아닐까.

 이집트 아윱조의 술탄, 정적(政敵)인 동생 없애려 십자군에 출병 요구 

십자군 전쟁을 단순히 종교 전쟁으로만 단정 짓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대표적 사례는 제6차 십자군 전쟁(1228~1229)에서도 발견된다.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던 이슬람 왕국 아윱조(1171~1260)는 시리아의 이슬람 왕국을 무너트리기 위해 시칠리아의 군주 프레데릭 2세에게 출병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무슬림 군주가 직접 그리스도교 군주에게 십자군 출병을 요구하는 더욱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이 상황 역시 이슬람 세계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아윱조는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해 영웅이 된 살라딘이 12세기 말 이집트에서 새롭게 건설한 이슬람 왕조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 아윱조는 권력 승계 과정에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결국 13세기 초 왕조는 세 개 지역으로 분할돼 살라딘의 조카 알카밀이 이집트에서 술탄으로 등극했고, 알카밀의 두 동생이 각각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하게 됐다. 이집트의 술탄 알카밀은 시리아 군주가 된 동생 알무앗잠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결국 그를 제거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군주 프레데릭 2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그 내용은 시칠리아가 시리아로 군대를 출정시켜 준다면, 그 대가로 삼촌 살라딘이 탈환했던 예루살렘을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칠리아의 군주 프레데릭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는데,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처지였다. 그런데 이집트의 군주가 예루살렘을 돌려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해왔고, 그로서는 그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228년 프레데릭 2세가 직접 지휘한 약 3천 명의 시칠리아 병력이 팔레스타인 해안에 도착했고, 이로써 제6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시리아의 군주 알무앗잠이 이미 사망한 것이었다. 싸워야 할 공공의 적이 사라졌으니 동맹도 자연스레 무산 될 처지에 놓였다.

이집트 술탄 알카밀로부터 예루살렘을 양도받는 프레데릭 2세의 모습
이집트 술탄 알카밀로부터 예루살렘을 양도받는 프레데릭 2세의 모습

프레데릭 2세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만일 예루살렘 정복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유럽 전역에서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이집트의 술탄 알카밀과 대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벅찬 상대였다. 프레데릭 2세는 궁여지책으로 이집트의 술탄에게 편지를 써서 새로운 동맹을 제안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토로한 후,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집트의 술탄 알카밀은 프레데릭 2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1229년 2월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을 10년 동안 십자군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조약문에 서명했다. 이렇게 끝나버린 제6차 원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 전쟁의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두 군주에게 예루살렘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종교의 성지라기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얼마든지 협상 테이블 위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정치적 카드는 아니었을까.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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