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입력
2019.03.27 19:00
수정
2019.03.27 19:30
30면

이탄희 판사가 법복 벗으며 남긴 말

있어야 할 곳에서 할 일을 한 RBG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세상도 나아져

“기자가 되고 싶은 이 간절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외부기관 인턴 지원자의 자기소개서 글이다. 신입기자도 아니고 6개월짜리 인턴 지원에는 좀 과하다 싶었던 문장에 무심코 밑줄을 그었다. 기자, 간절함, 잊지 않겠다. 이 평범한 단어들의 조합이 빚어낸 묘한 감정은 면접에서 삐딱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미래가 불투명한 사양산업에 장시간 격무는 기본, ‘기레기’ 따위 집단매도가 일상이 돼버린 기자를 왜 하고 싶은가요?” 지원자들의 엇비슷한 답변은 금세 잊었지만, 저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졌다. 그 간절함의 1차 허들을 넘어 기자로 살고 있는 나, 너, 우리를 향한 물음으로.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해답을 구하지 못했다. 해답은커녕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조차 찾지 못한 채 꼬리를 무는 ‘질문 지옥’에 갇혀 지냈다. 기자를 왜 하고 싶은가, 아니 그보다 먼저 기자를 ‘간절히’ 하고 싶긴 한가, 기자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때늦은 정체성 찾기는 현재진행형이지만, 그에 동반한 질풍노도의 감정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 미친 바람을 다독여 잡아준 것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타인들의 삶이다.

첫손에 꼽고 싶은 이는 이탄희 전 판사다. 동료 뒷조사 지시를 거부하며 사표를 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을 드러내는 도화선이 됐던 사람. 지난해 말 사석에서 만난 그는 ‘참 맑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 무렵 시민단체에서 주는 ‘의인상’을 받았고 지난달 끝내 법복을 벗은 뒤 인터뷰에 응하고 TV에도 출연했지만, 그는 진실이나 정의, 용기 같은 거창한 말을 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띄운 퇴임 인사도 간결했다. “그동안 제 공직생활을 지켜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딱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공직자가 돼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판사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 1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삶이 이어지는 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지요.”

내가 누구인지 아는 판사. 짧지만 강렬한 저 말은 정답 없는 질문들에 짓눌렸던 날들을 뒤늦게 겪는 ‘성장통’으로 다시 보게 해줬다. ‘판사’ 자리에 기자, 아니 다른 어떤 직업이든 넣어보자.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의 잣대를 이만큼 명료하게 일러준 말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예컨대 질문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잃어버릴 때 삶은 비루해진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의 만남도 각별했다. ‘노터리어스 RBG’란 애칭으로 유명한 미국의 연방대법관? 맞다. 역사를 거스르는 연방대법원의 보수적 판결에 맞선 소수의견으로 진보 진영과 페미니스트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86세 고령에도 “최소 5년은 더 일하겠다”며 매일 팔굽혀펴기와 아령으로 몸을 단련하는 그 RBG. 그의 삶을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으로 잠시 엿보고선 감히 ‘만남’이라 일컬은 건 그만큼 울림이 컸기 때문이다.

평생을 차별에 맞서 싸워오면서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은 그의 삶을 깔끔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를 보고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우리에게 없는 건 루스가 아니라 마티(그의 남편)야.” 연방대법관인 아내가 법전에 얼굴 묻고 씨름하는 사이 기꺼이 부엌을 지키며 ‘연방대셰프’를 자처하면서 “이건 희생이 아니라 역할 분담”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남편이라니! 곧이어 집어든 책 ‘노터리어스 RBG’를 읽고 난 뒤에야 그의 삶을 관통하는 화두 역시 “내가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책 말미에 달린 부록 ‘RBG처럼 사는 법’에는 덜 분노하고 더 싸웠던 그의 삶을 압축한 여덟 문장이 잠언처럼 실렸다. ‘신념을 위해 일하라’에 이어진 조언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골라가며 싸워라’, ‘(한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세상은 넓고, 함께할 사람은 많다. 이들에게서 얻은 것은 암담한 현실을 벗어날 해답이 아니다. 미약하나마 질문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다. 고마움을 담아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계속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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