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처단” 첫 의열투쟁 단체 대한광복회, 1호 대상은 칠곡 부자 장승원

입력
2019.03.26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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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7>日총독 암살 모의한 한훈 

 

대한광복단이 처음 결성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의 추모탑. 박소영기자
대한광복단이 처음 결성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의 추모탑. 박소영기자

대한광복회는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첫 번째 전국단위 단체로 꼽힌다.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경북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단원이 함께 만든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라는 강령을 두고 독립전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목표로 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 지린(吉林)에도 광복회만주지부를 설치했다. 총사령은 조선국권회복단 출신 박상진이 맡았지만 부사령은 해외 인사로 선정했다. 군자금을 모아 만주에 군대를 육성할 사관학교를 세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무관학교 출신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의 두 번째 부사령으로 임명돼 만주로 파견됐다.

1915년 결성돼 1918년 와해되기까지 3년여간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친일 부호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금과 세금 수송마차 습격, 친일 부호 처단으로 나눌 수 있다. 대한광복회의 첫 번째 활동은 광복회 이름으로 대구 부호 정재학, 이장우, 서우순 등에게 군자금 협조 공문을 발송한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경주에서 세금운반 우편마차를 습격해 군자금 8,700원을 빼앗고 강원 영월의 상동광산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는 등 활동의 범위는 전국적이었다.

경북 풍기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에서 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발족한 대한광복회의 조직도를 설명한 부분. 박소영기자[저작권 한국일보]
경북 풍기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에서 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발족한 대한광복회의 조직도를 설명한 부분. 박소영기자[저작권 한국일보]

1917년 들어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금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자 대한광복회는 친일 부호 처단이라는 극단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첫 번째 대상이 바로 경북 칠곡 부호 장승원이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지내며 좌익 척결에 앞장섰고 정부 수립 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박상진의 스승인 허위의 도움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오른 장승원은 후일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20만원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허위의 순국 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 강순필, 임세규, 유창순 등이 나서 장승원을 처단했다.

대한광복회의 두 번째 처단 대상은 충남 아산의 도고 면장 박용하였다. 박용하는 당시 도고 지역에서 지역주민을 괴롭히는 친일 면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1918년 1월 24일 우재룡으로부터 권총을 받은 충남지부장 김한종, 장두환, 김경태, 임세규 등이 박용하 처단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르면 이번에도 이들은 '본 회의 지령을 위반하였으므로 사형에 처하니 우리 동포는 경계할지니라, 경계할지니라, 광복회 지령원'이라는 내용의 사형선고문을 작성했다. 박용하 처단이 끝난 후에는 그 집 처마 끝에 선고문을 묶어놓고 나왔고, 이로써 대한광복회 수사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사흘 뒤 장두환이 체포된 데 이어 2월 초에는 총사령 박상진이, 6월에는 채기중이 경찰에 붙잡혔다. 박상진과 채기중이 1921년 8월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와해됐다.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스승으로 의열단의 고문을 맡았던 황상규 지사. 위키백과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스승으로 의열단의 고문을 맡았던 황상규 지사. 위키백과

대한광복회는 사라졌으나 사람은 남았다. 한훈을 비롯해 체포를 피한 대한광복회 단원 중 다수가 일생을 바쳐 무장 의열투쟁을 지속했다. 의열단에 가입한 대원들도 여럿이었다. 대한광복단과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황상규는 약산 김원봉의 스승이자 고모부였다. 황상규는 1919년 의열단이 결성될 때 고문을 맡으며 의열단에 투쟁 방략을 전수했다. 김상옥 역시 의열단에 가입,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키는 등 의열투쟁 노선의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력 초반에는 대한광복회가 있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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