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이야기 고작 2년… 페미니즘 투쟁은 계속 돼야죠”

입력
2019.03.24 18:00
수정
2019.03.24 20:4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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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걸크러시’ 작가 바지외 방한

23일 방한한 프랑스의 그래픽노블 작가 페넬로프 바지외가 자신의 책 '걸크러시'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소범 기자
23일 방한한 프랑스의 그래픽노블 작가 페넬로프 바지외가 자신의 책 '걸크러시'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소범 기자

“제가 이 책을 냈을 때 ‘또’ 여자 이야기냐고, 지겹다고 했어요. 하지만 남자들의 이야기는 그 동안 계속 해왔잖아요. 여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이제 2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프랑스 그래픽노블 ‘걸크러시’의 작가 페넬로프 바지외(37)의 말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 정권에 맞선 마리포사 자매, 거추장스러운 수영복 대신 오늘날의 여성용 수영복을 개발한 수영선수 애넷 켈러먼, 남장을 하면서까지 산부인과 의사로 활약한 아그노디스. ‘걸크러시’에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나아가 세상을 바꿨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여성 30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 인터넷 블로그에 2016년 1월부터 10월까지 연재한 만화를 책으로 묶었다. ‘걸크러시’는 연재 당시 5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책은 각국에서 35만부가 판매될 정도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한국에는 지난해 9월 번역 출간됐다.

바지외 작가를 23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그는 프랑스어 사용 공동체가 주최하는 문화행사인 ‘2019 프랑코포니 축제’에 참석하려 한국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았다. “책에 미처 싣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아주 많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이번 방한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한국 독자들, 그 중에서도 젊은 여성독자들과 나눈 대화”라고 말했다.

'걸크러시'에 소개된 30명의 여성 인물 중 한 명인 테레즈 클레즈는 저소득 노년 여성들의 공동 생활 공간인 바바야가의 집을 세운 프랑스의 여성운동가다. 문학동네 제공
'걸크러시'에 소개된 30명의 여성 인물 중 한 명인 테레즈 클레즈는 저소득 노년 여성들의 공동 생활 공간인 바바야가의 집을 세운 프랑스의 여성운동가다. 문학동네 제공

책에는 싱어송라이터인 베티 데이비스, 무민을 탄생시킨 만화가 토베 얀손 같은 비교적 익숙한 인물도 소개되지만, 화산학자인 카티아 크라프트, 사회운동가인 나지크 알 아비드처럼 낯선 이름들이 주를 이룬다. ‘유명하지 않거나, 유명한 인물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집중 조명하는 건 바지외 작가의 ‘전략’이었다. “조세핀 베이커는 바나나 벨트를 두르고 반나체로 춤춘 카바레 무용수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레지스탕스 활동가였어요. 전 세계 아이들을 입양했고,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했지요. 헤디 라마 역시 아름다운 여배우인 동시에 와이파이의 기반이 되는 통신기술 발명가였고요. 여성들을 ‘외모’가 아닌 그들의 ‘도전’으로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책을 통해 전세계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지만, 바지외 작가 또한 한때는 마땅히 ‘롤모델’로 삼을만한 여성 작가가 없어 낙심했었다. “널리 알려진 여성 만화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만화의 주인공으로도 여성은 턱없이 적었어요. 그래서 ‘걸크러시’에 다양한 직업의 여성을 등장시키려고 했어요. 화산학자나 등대지기, 우주비행사 같은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보면서 여자 아이들이 ‘한계 없이’ 꿈 꾸기를 바랐어요. 책을 내고 어린 여자 아이들로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다거나, 책에 나오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편지를 아주 많이 받았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이었죠.”

에넷 켈러먼은 여성들도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 오늘날의 여성용 수영복을 개발했고,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해방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문학동네 제공
에넷 켈러먼은 여성들도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 오늘날의 여성용 수영복을 개발했고,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해방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문학동네 제공

‘걸크러시’를 그리면서 알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바지외 작가 스스로의 관점도 바꿔놓았다. “만화를 그리는 내내 등장인물들의 전기를 읽고 조사하면서 진취적 여성들의 모습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고 함께 분노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바지외 작가는 책 홍보를 위해 전세계를 다니며 만나는 여성들로부터 계속 배움을 얻는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대학생, 고등학생 같은 젊은 여성 독자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어요. 특히 소설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소설에 대한 감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적었을 뿐인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는 경험담도 듣고,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 투쟁을 계속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도 받았어요. 공교롭게도 저도 1982년에 태어났어요. 프랑스도 여성들이 겪는 상황은 비슷해요. 같은 직종에서 일해도 남성보다 소득이 20% 정도 적고, 가정폭력 같은 폭력에 훨씬 더 많이 노출돼 있죠. 지난해에는 길거리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치근덕거리는 행동을 막는 ‘캣콜링 방지법’이 제정되기도 했어요. 뿌리깊은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가 이제서야 수면 위로 드러나는 거죠. 바뀌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아요.”

바지외 작가는 ‘미투 운동’을 비롯한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하는 한국 젊은 여성들의 뚜렷한 문제의식과 용기에 대해 감탄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68혁명 세대의 페미니스트이셨어요. 다음 세대는 여자 아이들의 천국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네요. 아직도 낙태 합법화 운동을 해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8살, 3살인 딸들에게 늘 말합니다. ‘희망은 품되,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요. 한국 여성들도 부디 투쟁을 계속 해주세요. 저도 프랑스로 돌아가면 아이들과 영화 ‘캡틴 마블’을 볼 생각입니다(웃음).”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김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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