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얼리버드’들이 판치는 세상에 고함

입력
2019.03.23 04:40
27면

늦잠을 잤다. ‘쿵’ 하고 들려온 위층 사람의 발소리에 눈을 떴다. 침침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보니 아침 9시 2분. ‘클났네, 지각이야.’ 한순간 머리를 싸쥐었다. 그러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며 정해진 시간 안에 출근하지 않아도 지청구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했다.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어두운 하늘 아래 하얀 매화가 새치름하게 봄비를 받아내는 중이었다. 비 내리고 날이 흐려서 늦잠을 잤구나. 그나저나 개인사업자로 산 지 15년이 더 지났건만 이놈의 출근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쑥불쑥 놀라 자빠진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기분 좋을 만큼 푹 자놓고도 부아가 치밀었다.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때, 내가 집을 구하는 최우선 조건은 회사와 가까운 동네였다. 버스로 세 정거장을 넘지 말고, 걸어서 20분 이내일 것. 조금이라도 더 아침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밤이 되면 화려하게 깃을 뽑아 올리는 올빼미도 못 되었다.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두 시간쯤 많이 잤다. 밤 11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서 아침 7시 넘어야 일어나는 게으른 인생. 고백하자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수면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 결함이자 콤플렉스였다. 함께 일하던 어느 유명 작가는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매일 여덟 시간 넘게 자면서도 치열한 생존 전장에서 이탈하지 않는 걸 기적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기야 그이는 이틀에 한 번, 네 시간씩만 잠을 자는 사람이었다. 밤새워 머리 맞대고 책과 글의 방향을 논의해도 아까울 판에 담당 편집자란 인간이 저녁만 처먹으면 꾸벅꾸벅 졸아대니 그이로서는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게다. 잠을 줄여 보려는 몇 번의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뒤 나는 지각만은 하지 말자는 현실적 타협안을 세웠다. 그리하여 회사 인근에 집을 구하고, 탁상시계를 5분 단위로 세 번 울리게 맞춰놓고 살았다.

뒤늦게야 알았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온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은 게으름의 징표도, 부끄러워할 문제도 아니었다.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한 뒤에야 그 중요한 진실을 알았다는 게 얼마나 원통했는지 모른다. 지금 학자들은 잠이 통상의 휴식 차원을 넘어서는 우리 삶의 중대한 영역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오직 잠을 자는 동안에만 우리 혈관계와 면역계, 피부, 간과 장기들은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내므로. 오직 잠을 자는 동안에만 퐁퐁 솟는 성장 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키가 크고, 노화에 맞선 싸움이 진행되므로. 그리하여 어제도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은 건 다 숙면 덕분이다.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면 생체시계가 개인이나 연령에 따라 천차만별이건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사회 시스템을 따라가느라 전 세계 30% 넘는 사람들이 매일 아침 좀비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읽을 때는 적잖은 연대감마저 느꼈다. 한술 더 떠서 우리 출판사의 저자이기도 한 신경생물학자 페터 슈포르크는 말했다.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현대인이 하루바삐 뜯어고쳐야 할 게 바로 폭력적으로 운용되는 학생들의 등교 및 직장인의 출근 시간이라고. 그 목소리가 얼마나 또렷했던지, 유럽의 몇몇 학교가 등교 시간을 9시로 미루는 실험에 나섰다. 단지 그것만으로 학생들의 성적이 좋아지고 양호실에 들락거리는 횟수가 줄었으며 우울감을 호소하는 비율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결과에 고무돼 등교 시간을 조정하는 학교가 늘고, 기업들은 개인이 일할 시간을 선택하는 탄력근무제를 도입해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니, 얼마나 멋진 복음이란 말인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우리 사회도 아침잠 많은 사람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할 때다. ‘전국레이트버드연대’ 같은 게 생긴다면 깃발 들고 앞장설 참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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