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성우월주의 논란 휩싸인 '법의 잣대'

입력
2019.03.20 04:40
수정
2019.03.20 18:4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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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외모” 강간 무죄 판결

바람 핀 여성에게도 책임 있다며 살해 남성 감형하기도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대법원 전경. 위키피디아 캡처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대법원 전경. 위키피디아 캡처

“남성의 유혹에 여성이 행복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제나 나를 유혹하려는 건 여성들이었다. 중요한 건 그 구애가 ‘우아’하다는 점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81) 전 이탈리아 총리가 지난해 1월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전직 총리의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남성 편향적인 이 발언은 전세계적 비난을 받았으나, 정작 이탈리아 내부에선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특유의 ‘가톨릭 문화’와 뿌리깊게 박힌 남성 우월주의 탓에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로 손꼽혀 왔다.

그랬던 이탈리아 내부에서 최근 “남성 우월주의적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 가장 보수적으로 꼽혀온 이 나라 사법부의 최근 ‘가부장주의(chauvinism) 판결’이 그 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며칠은 사법부로 인해 이탈리아 여성들의 낙담한 시간들”이라고 이탈리아 사법부의 남성 편향적 판결을 소개했다. 논란을 촉발한 첫 번째 사건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고등법원은 동거녀 제니 안젤라 코엘로 레예스를 목졸라 살해한 나폴레옹 하비에르 감보아 파레하에 16년형을 선고했다. 당초 20년을 선고했으나 16년으로 감형한 것인데, 문제는 감형 사유였다. 재판부는 “제니의 모순적인 행동이 가해자를 절망시켰다”고 감형 이유를 밝혔다. 당시 제니는 나폴레옹을 만나면서 전 남자친구와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이런 행동이 죽은 제니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여성계는 즉각 반발했다. 유럽 내 폭력 피해 여성 구제 단체의 이탈리아 대표인 엘레나 비아지오니 변호사는 “마피아를 벌주면서 마피아의 복잡한 집안 사정까지 고려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피해자측 변호인인 마리아 갈로는 “집안의 여성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했을 때 죽여도 된다는 ‘명예살인’을 연상시키는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이탈리아 사법부는 피해 여성의 “남성적 외모와 성향”을 들어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두 남성은 2015년 당시 22살이었던 페루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017년 2심 재판부는 피해 여성의 증언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특히 피해 여성이 남성적인 외모를 가진 점 등을 들어 성폭행을 당했을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황망한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두 사건을 담당한 판사들은 모두 여성이었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나며 이탈리아 여성계에선 자성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여성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루이자 리치텔리는 “이탈리아에는 카톨릭 문화에 더해 남성 우월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며 “이탈리아 여성들도 남성과 똑같이 가부장주의에 젖어 있다”고 말했다. 엘레나 변호사도 “이탈리아는 특히 가부장주의 문화에 민감하지 못하다”며 “이탈리아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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