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고마운 고백

입력
2019.03.19 04:40
29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푸념이 일반화된 사회는 부끄럽고 절망스럽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고 있다.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서 더더욱 민망하다. 상상해서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나라를 또 빼앗긴다면 과연 우리는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그러라고 독려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당당함은 있는가?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말을 공당의 대표라는 자가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문제가 불거지니 다른 뜻이었다고 변명하지만 겁결에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말이다. 반민특위를 무산시킨 세력이 권력을 쥐었고 거기에 부역한 자들이 친일매국 세력이었음은 역사가 증언한다. 그 필연적 절차를 무참히 짓뭉개면서 친일부역 세력들이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권력과 재력을 쥐었으며 독재에 가담해서 계속해서 그것들을 누렸다. 지금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 때문에 권력을 넘긴 세력들로서는 재력은 여전히 쥐고 있어도 권력을 쥐고 있지 못하니 분하고 원통할지 모르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을 끝내 토설한 셈이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된 기간은 겨우 3년이었다. 전후에 전범재판에 수많은 부역자들이 기소되었는데, 무려 7,03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중에는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 정치인, 예술가 등 두루 망라되었다. 심지어 작은 동네 술집 여자가 독일군 장교와 놀았다는 이유로 머리가 깎이고 벌거벗겨져 동네를 돌아야 했다. 부역자들은 이후에도 공직에 절대 등용되지 못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 같은 이들은 레지스탕스 출신이었다. 프랑스인들에게 부역은 죽는 길이고 적에 대한 저항은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41년(을사늑약부터) 국권을 빼앗겼으니 프랑스보다 열배는 더 많은 단죄의 대상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걸 척결하는 건 역사의 사명이다. 그러나 그 사명은 무참히 짓뭉개졌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반민족 사범에 대한 재판을 열었지만 온갖 훼방에 의해 지리멸렬하게 끝나고 말았다. 허망하고 원통한 일이다. 이승만의 과오 가운데 중요한 허물이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환영식도 없이 개별적으로 쓸쓸하게 돌아왔다. 그 후손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제1야당 대표의 발언은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가?

매국부역자들이 부끄러워하거나 참회하는 일은 희귀하고 오히려 권력과 재력을 유지하며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민낯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그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건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가치다. 그러나 사실에 반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하물며 국가와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리는 더더욱 없다. 그 자체가 엄청난 ‘가짜뉴스’라면 그 언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말로 사달을 일으키는, 그것도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사람은 관심 그 자체로 성공이라 여길지 모른다. 정치의 중심에 서있는 착각에 빠졌을지 모른다. 거기에 취하거나 상대의 공격을 막는다는 심사가 여과 없이 뱉어지며 그동안 감췄던 속내까지 드러냈을 것이다. 반민특위 때문에 국민이 분열했다는 해괴한 사고를 유력한 정당의 대표가 뱉어낸 건 이번 언행 공박의 수확이다. 그녀와 그 정당의 실체를 새삼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니 “나 모 의원은 아베의 대변인이다.”라는 말이 회자되어도 할 말이 없게 된 셈이다.

공인의 말은 가볍지 않다. 말은 그 주인의 인격을 대변한다.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말은 행동보다 쉽다. 그러나 기록되는 말은 행동보다 무겁고 무섭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정치적 견해와 해석은 다를 수 있다. 가능한 한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나름대로 나라 걱정해서 한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친일과 독재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퇴행적 안보관에 사로잡혔으며 심지어 정권을 위해 휴전선에서 총격 청부를 부탁하기도 했던 정당의 정치인들은 더 반성해야 한다. 적폐청산이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고 그래서 분열하는 게 아니다. 적폐청산을 못해서 분열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뿌리가 친일매국행위와 그에 대한 단죄다. 그걸 새삼 깨닫게 해주면서 자신의 정치관과 속내를 고백했으니 고마운 일이다.

차제에 프랑스와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각각 어떻게 행동했는지 면밀하게 비교하고 반성해야 한다. 3ㆍ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대통령의 발언이 일본을 불편하게 했다며 비판한 정치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민특위 무산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되돌아볼 일이다. 그녀의 언행을 보면서 그런 생각과 말을 감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쓰럽기도 하고 끝내 커밍아웃해서 그 정체를 알게 해주었으니 고맙기도 하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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