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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는 딸이 셋인 딸 부잣집의 막내로 태어났어요. 태어날 때부터 남자아이가 아니어서 집안 모두가 실망했다고 들었어요. 엄마는 저를 갖기 전에 아들을 낳으려고 낙태를 두 번이나 했고, 엄마의 건강이 염려된 의사가 남자아이라고 속여 저를 낳게 됐대요. 어렸을 때부터 네 살, 여섯 살 터울인 언니들은 종종 “넌 태어나선 안될 아이였다” “가정형편도 안 좋은데 왜 태어났냐”며 저를 미워했어요. 그런 소리를 계속 들어서인지 저 스스로도 가족에게 부담만 주는 존재 같아서 자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 아빠는 그런 언니들을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지요.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에게 욕을 내뱉어 문제가 된 적이 있어요.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엄마는 그 이후로 저를 구제불능 취급했어요. 반성하고 가족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저는 최대한 부모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어요. 전교 6등을 할 만큼 공부도 악착같이 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돈 아깝다고 학원 한번 보내주지 않았고,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네가 아무리 잘해도 큰 언니만큼은 안 된다’고 평가절하하셨죠. 저보다 공부를 못했던 작은 언니와 문제집 값을 두고 다투다 ‘언니보다 내가 공부를 잘하니 내 문제집을 사는 게 맞다’고 했다가 부모님에게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어요. 부모님은 언제나 언니들 편이었어요. 잘하면 잘난 척 한다고 혼내고, 못하면 못한다고 무시했어요.

대학 입학에 실패한 뒤부터 저는 집안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았어요. 집안도 어려운데 재수한다며 눈칫밥 먹기 일쑤였지요. 작은 언니는 삼수를 했는데도 당당했어요. 당시에 큰 언니가 임용고시에 떨어졌는데, 엄마는 제가 맨날 울어서 집안에 재수가 없다며 언니가 시험에 떨어진 게 제 탓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독학으로 명문대에 입학했을 때도 집안 식구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어요. 왕복 세 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통학하고 쉴새 없이 아르바이트 하면서 대학을 겨우 마쳤습니다. 어떨 땐 힘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진 적도 있었지요. 저한테는 그토록 매정했지만 엄마는 지방에서 자취하는 언니들이 집에 올 때면 고기도 구워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엄마의 바람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거듭 낙방했어요. 다행히 외국계 중소기업에 취업했지만, 엄마는 저를 계속 부끄러워하고 못마땅해하세요. 너무 힘이 들어서 방에서 울고 있으면 엄마는 모르는 체 아무 말 없이 방문을 닫고 나가요. 언젠가 엄마에게 왜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믿어주지 않냐고 속내를 털어놓으니 엄마가 “다른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으냐”고 반문하며 “착각하지 말라”고 차갑게 얘기했어요.

취업하면서 지방으로 가게 돼 집에서 독립을 했지만, 다시 이직해 고향 근처로 오게 됐어요. 근처에 살다 보니 엄마나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엄마는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가서도 사교적이지 않으면 굉장히 화를 내세요. 결혼도 빨리 하라고 재촉하십니다. 갑자기 제 이름이 문제라며 개명하라는 얘기까지 합니다. 저는 제 삶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열심히 살아왔는데, 엄마와 가족들에게 저는 그저 부끄러운 존재인 것만 같습니다. 가족들에게 화가 나면서도 모든 게 제 잘못 같기도 해요. 왜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힘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제대로 했거나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괜히 태어난 게 아닐까요.

최혜연(가명ㆍ35세ㆍ회사원)

혜연씨, 사연을 읽고 당신에게 가족은 ‘굴레 같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굴레 안으로 들어갈 수도,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그런 굴레 말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자니 너무나 고통스럽고, 벗어나려니 죄책감이 밀려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신이 너무나 가여웠어요.

당신은 왜 굴레 안으로 들어가는 게 고통스러울까요. 당신은 가족들로부터 정말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근본적인 존중을 받지 못했어요. 출생은 누구에게나 축복이어야 하고, 가족들은 마땅히 서로에게 힘이 돼줘야 하는 존재인데도 말이지요. 혜연씨의 엄마는 당신을 언니와 차별하고, 조금 덜 사랑한 게 아니라, 당신을 아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으로서 존중하질 않았어요. 기본적인 존중을 담고 있는 사랑을 못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고통스러웠을 거에요. 아무리 잘하고, 노력해도 가족들로부터 존중 받질 못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너무나 큰 상처였을 거에요.

가족들은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가족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엄마와 언니들 인생에서 당신과 상관없이, 심지어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힘들었던 자기들 인생의 갈등, 미움, 서러움, 자신들 내면의 문제들을 당신에게 모두 뒤집어씌워버리는 거지요. 당신을 혼내고, 지적하고, 비난하고, 당신 탓을 해 본질적인 문제를 싹 감추고, 당신 뒤로 숨으면서 본인들은 편안해지지요. 당신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면서 자기들끼리는 당신이라는 공동의 적을 만들어 속닥거리고 흉보고 비난하면서 동맹을 맺는 것으로 유대감을 강화하지요. 당신은 물론 하나도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실은 당신의 엄마와 같은 엄마들을 종종 봅니다. 본심은 자식을 사랑하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굉장히 서투르죠. 자식을 비난하고,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혜연씨가 스스로의 힘으로 명문대에 가고, 취업하고, 너무나 잘 살고 있는데도, 엄마는 당신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했어요. 많은 부모들이 이런 실수를 하지만, 당신의 엄마는 정도가 심했어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투르다는 것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요. 혜연씨 어머니에게 더 큰 문제가 있어 보여요. 그건 아마도 엄마가 갖고 있는 문제들, 아들을 낳지 못한 한, 넉넉하지 않은 집안형편 등 엄마의 인생에서 힘든 것에 대해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 희생양이 당신이 됐을 거에요.

당신의 큰 언니는 엄마에게는 자랑스러운 딸이었을 거에요. 엄마의 한 많은 삶에서 큰 언니가 위안이 됐을 거에요. 똑똑했던 언니는 엄마의 체면이고, 영광이자 자랑스러움이었을 거에요. 그러면서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딸이었을 거에요. 그런 딸이었던 큰 언니는 당신이 이유 없는 구박을 받아도 모른 척, 무관심했을 거에요. ‘엄마가 나한테는 잘해주니깐 상관없어’라며, 가족의 갈등상황을 피하기만 했을 거에요.

게티이미지뱅크

작은 언니는 다른 가족보다 당신을 더 못살게 굴었던 것 같아요. 공부도 못하고, 말썽도 꽤 피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가 문제가 있을 때 동생을 비난해서 싸움을 일으키고, 동생이 결국 혼나게 만들어 자신의 문제는 감추었을 거에요. 동생을 궁지에 밀어 넣고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이 이득을 취하고 살아남았을 거에요. 언니도 동생을 희생양으로 만들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내면에 자리잡아서 당신을 괴롭히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을 테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언제나 남 탓, 당신 탓을 했을 거에요.

이런 당신의 가족들을 생각해보면 흡사 냉혹한 ‘동물의 왕국’이 연상돼요. 그 안에서 타고난 기질이 순하고, 정에 약하고, 기가 약한 당신이 희생양이 된 것 같아요. 보통 그런 핍박을 받으면 악다구니를 쓰며 반항하고,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당신처럼 속절없이 당하고 맙니다. 무력해지는 거지요. 혜연씨도 성장하면서, 다 큰 어른이 된 현재까지도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에까지 언제나 무력감을 느끼지요. 당신은 건강하지 못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래도 꼿꼿하고 의젓하게 잘해 왔어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결국에는 잘해내는 힘도 갖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로부터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격려와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스스로 결정한 것은 해내고, 갈 길을 잘 찾았어요.

그런데 가족과 당신의 장래와 생각에 대해 의논만 하면 무기력해졌어요. 왜냐하면 가족들이 ‘네 까짓 게 뭔데, 넌 아무리 해도 못할 거야’라고 당신을 핍박했으니깐요. 그들의 건강하지 못한 태도와 그릇된 기준 때문에 당신은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가족의 가장 기본인 지지와 용기, 격려, 때로는 아프지만 사랑을 담은 충고, 안정감 등이 불행하게도 당신의 가정에는 전혀 없었어요. 이건 당신을 차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언니들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에요. 그들도 불행하지요.

잔인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당신은 가족들과 당신의 미래에 대해 의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당신이 힘들어 할 때 격려와 지지를 해줘야 하는 가족들이 불필요하게 걱정한답시고 비난이나 한다면 그런 가족들과의 의논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 동안 스스로 결정해서 바른 길로 잘 살아왔잖아요. 계속 그렇게 나아가면 됩니다. ‘나 차 사야 하는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라든가, ‘저 재수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요’라든가,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으니, 허락해주세요’ 등 당신과 관련된 수많은 일들을 가족과 상의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1년에 설과 추석 등 명절과 어버이날, 부모님 생일까지 4~6번만 집에 방문하세요. 당신이 아무리 자주 가도, 용돈을 많이 드려도 당신의 엄마는 못마땅해 하고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을 거고, 당신을 계속 비난할 거에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언제나 반대를 할 것이고 앞길을 가로막을 거예요. 작은 언니는 당신이 잘해나갈수록, 언니 자신의 존재의 유지를 위해서, 또한 자신의 문제와 건강하지 못한 내면이 드러날까봐 필사적으로 당신을 비난하고 몰아 붙이고 당신과 갈등을 유발하고 싸움을 계속 일으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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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연을 끊고 사는 게 좋겠다는 조언은 하지 않을게요. 아마 그런 조언은 당신의 어깨에 더 짐을 얹어주게 되고, 또 다른 형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가족으로부터 기본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데 대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당신 안에는 결핍이라는 큰 구멍이 있는 어린아이 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부모 곁을 쉬이 못 떠나지요. 가족 주위를 맴돌면서 고통스럽고 힘들어하지요.

그런 당신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당장 가족과 연을 끊진 않더라도 적어도 당신의 미래에 대해 가족과 의논하지는 말아요. 집에 갈 때도 엄마가 오라고 해서 가는 게 아니라 혜연씨가 주체가 되어 당신 마음의 가는 대로 가기 싫으면 거절도 하고, 당신이 정말 가고 싶을 때 잠깐 들르는 게 좋아요. 그래야 당신의 엄마도 당신에게 더 이상 못할 짓을 안 할 것이고, 관계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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