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2막!] 은행맨에서 스마트 화가로… 태블릿에 쓱쓱 “어때요 그림 참 쉽죠?”

입력
2019.03.13 04:40
수정
2019.03.13 07:5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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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밥 로스’ 정병길 화백

※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 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 고영권 기자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 고영권 기자

“어때요, 참 쉽죠?”

이 명대사로 1990년대 TV 시청자들을 단 번에 사로 잡았던 미국의 화가 밥 로스를 기억하시는지. 뽀글뽀글 파마 머리에 커다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손쉽게 풍경화 한 점을 뚝딱 그려냈던, 영원한 우리의 미술선생님이었다. 그런데 2019년 한국에도 그 밥 로스가 등장했다. 근데 이 선생님은 좀 다르다. 포근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외모는 그대로지만 커다란 이젤 대신 태블릿PC를, 붓 대신 스마트펜슬을 들고 있다. 게다가 밥 로스가 10분 걸려 그림을 완성했다면, 이 할아버지는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배경부터 밑그림까지 일필휘지로 한 번에 끝내는 21세기형 화가다. 30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뒤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의 길을 걸으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정병길(66)씨 이야기다.

◇5분 만에 뚝딱, ‘스마트화가’의 그림 그리기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는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윗집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상이다. 체크무늬 셔츠 위에 재킷을 입고, 귀에는 보청기를 꼈다. 등에 멘 큰 등산가방 옆주머니엔 보온통이 꽂혀있다. 영락없는 동네 할아버지다.

하지만 ‘스마트화가’라는 별명답게 평범한 외관 뒤에 숨기고 있던 예술혼을 곧장 드러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정씨는 다짜고짜 “모바일 미술이라는 게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지 보여 드릴게요”라며 커다란 가방에서 불쑥 태블릿PC와 검은색 플라스틱 필통을 꺼냈다.

그는 능숙하게 태블릿PC의 전원을 켜고 필통에서 기다란 스마트펜슬을 꺼내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컴퓨터의 ‘그림판’을 연상케 하는 프로그램을 띄웠다. 정씨는 “아트레이지(Artrage)라는 디지털 페인팅 애플리케이션(앱)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5분이면 훌륭한 그림 하나 완성할 수 있습니다”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가 태블릿PC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승엽 기자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가 태블릿PC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승엽 기자

5분은 좀 힘들지 않겠냐며 시범을 보여 달라고 했다. 정씨는 태블릿의 화면을 옷깃으로 슥슥 닦더니 하얀 화면 위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선의 굵기와 효과를 조절하는 손짓이 능숙해 보였다. 대략적인 스케치를 마친 뒤 그림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3분 10초가 걸렸다. 백두산 천지의 풍경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정씨는 “조금만 배워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모바일 미술의 매력”이라며 웃었다.

정씨와 만난 광진문화원의 로비와 복도에는 정씨가 그린 작품 10여 점이 전시돼 있었다. 석류를 그린 정물화부터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을 그린 풍경화들이 하얀 벽에 걸려 있었다. 가까이서 보기 전까진 평범한 유화로 착각할 만큼의 질감이 느껴졌다. 정씨는 “처음엔 헬로크레용이라는 앱을 썼는데 그건 초보자들이 사용하는 거라 아트레이지로 바꾸고 나서부터 더 정교하게 그릴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30년 동안 농협에서 근무한 60대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테크-긱(Tech-Gigㆍ신기술에 강한 지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씨는 “저 사실 유튜브도 합니다. 구독자는 몇 명 안 되지만요”라고 수줍게 고백했다.

◇’왕자파스’를 갖고 싶었던 소년

정병길씨는 1953년 전남 나주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 수업만 손꼽아 기다리던 화가 지망생이었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정씨는 “당시엔 선생님이 나눠준 복사지보다 얇은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래도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사용하던 ‘왕자파스’만은 너무 갖고 싶었죠. 색 종류부터 질감까지 제가 쓰던 크레파스와는 달랐거든요. 아직도 생각나네요, 왕자파스”라며 회상에 잠겼다.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할 만큼 실력도 있었지만 화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미술하겠다는 이야긴 입 밖에 꺼내기도 힘든 상황이었죠. 결국 장학제도가 있는 경기 고양의 농협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농협중앙회 소속으로 농민지원파트에서 일하다, 은행으로 옮겨 금융과 신용 사업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농협교육원 교수 생활을 하다 지점장을 끝으로 30년 넘게 재직한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슬하의 두 아들을 건장하게 키워냈다.

직장생활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남몰래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주말마다 화실과 문화센터를 다니며 유화나 소묘를 그렸다. 정씨는 “남들은 골프나 술 마시는 걸 좋아하던데 나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았습니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가 자신이 그린 모바일 아트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서울 광진문화원에서 만난 정병길씨가 자신이 그린 모바일 아트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은퇴 후 만난 모바일아트, 새 인생을 열다

2010년은 정병길씨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정들었던 직장에서 퇴직한 정씨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고백했다. “이제 100세 시대라고 해서 살날은 많이 남았는데,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다 퇴직금은 받았지만 아주 풍족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뭔가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그때부터 정씨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법을 배우러 문화센터를 다녔다. 그러다 만나게 된 것이 바로 ‘모바일아트’였다. 블로그 운영하는 법 강의를 들으러 갔던 2013년, 정씨가 그림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사로부터 태블릿PC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처음 접한 모바일아트는 정씨에게 신세계였다. “처음 시험해봤는데 너무 쉽고 재밌더라고요. 무엇보다 무거운 이젤과 각종 재료, 도구를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정씨는 그 자리에서 바로 태블릿PC을 구매하러 판매점으로 달려갔다. 급작스레 구입하기엔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에 정씨는 “이 정도 투자는 해야죠. 내가 좋아하는 일인데”라며 웃었다.

당시엔 모바일아트란 개념이 국내엔 없어 혼자 독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30년간 농협에서 일하며 익힌 컴퓨터도 도움이 됐다. 해외 아티스트의 영상을 보며 따라 그렸다. 그리면 그릴수록 실력이 늘었다. 2014년부터는 개인전을 11번이나 개최할 정도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2014 시니어 IT 일자리 사례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감격을 맛봤다.

정병길씨가 지난 5일 서울 장충중학교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모바일아트 강의를 하고 있다. 정병길씨 제공
정병길씨가 지난 5일 서울 장충중학교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모바일아트 강의를 하고 있다. 정병길씨 제공

◇“누구나 화가 될 수 있다” 모바일아트 전도사

정병길씨는 이제 ‘스마트화가’로 불리며 모바일아트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현재 모바일아티스트그룹의 회장이기도 한 정씨는 회원들과 함께 각종 전시회를 함께 개최하고 전국의 문화센터를 돌며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는 법’을 강의하고 있다. IT 전문가답게 강의 때 사용하는 파워포인트 파일도 손수 제작하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활용해 각종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씨에게 모바일아트를 배운 수강생이 벌써 300명을 넘는다. 정씨는 “우리가 뇌의 10%만 사용하듯이 디지털 페인팅 앱도 전문 아티스트처럼 모든 기능을 사용할 필요 없이 2~30%만 다뤄도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라며 “전자기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미술을 몰라도 딱 10분만 배우면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5일부터는 학생들을 상대로도 강의를 시작했다. 서울 장충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 강의를 맡아 16명의 학생들에게 모바일아트의 즐거움을 알리게 된 것이다. 정씨는 이달 중순부터 서울 목은초등학교에서도 방과후학교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정씨는 자신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준 모바일 미술이 다른 이들에게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배우신 분들 중에 간혹 디지털 그림에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영혼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사람 살아가는 데 재밌는 게 영혼이지, 슬프고 어렵다면 그게 영혼일까요. 저는 앞으로도 재밌는 그림을 그리는 인생의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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