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혐오의 시대

입력
2019.03.12 04:40
수정
2019.03.12 09:4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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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도’는 <한국일보>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8일 여성의 날 111주년을 맞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오후 3시 조기 퇴근’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여성의 날 111주년을 맞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오후 3시 조기 퇴근’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 혐오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몇 달 전 인터뷰로 만난 인권재단 사람의 송정윤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재단은 지난해 구글과 인권 인식개선 홍보영상 시리즈를 제작해 온라인에 배포했고, 송씨는 그 실무책임자였다. 장애인, 페미니즘,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 6가지 소재로 만든 영상은 각각 20만~60만뷰를 기록했다.

좋게 말해 사회 갈등이 첨예한, 나쁘게 말하면 혐오 논란의 최전선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호의적인 반응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동영상에 비난 댓글이 달렸고(현재는 전부 삭제됐다), 항의 연락도 이어졌다.

재단이 선정한 ‘소수자’ 중 유일하게 무난하게 넘어간 분야가 장애인이다. 혐오 댓글도, 항의 전화도 없었던 그 영상의 주제는 ‘탈시설운동’이었다. 영화 ‘어른이 되면’의 주인공인 발달장애인 장혜정씨가 나오는 첫 장면은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보호해야 한다고, 능력이 없다고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 이 통념을 깨고자 우리는 행동합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분짓지 말라는,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하라는 영상의 메시지와 상관없이 대중은 보호받아 마땅한 이들의 인권을 외치는 건 용인할만한 운동이라 여긴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 정상만이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이 제국의 통치술을 분석한 책 ‘관용(2010, 갈무리 발행)’에서 한 말이다.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작금의 권력은 차이(다양성)를 제도 밖으로 내던지지 않고, 관용을 통해 기존 질서 안에서 관리한다. ‘불관용에는 불관용으로’란 말처럼, 관용은 관용의 대상(약자)이 권력이 허용한 범위를 넘을 때 가할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다.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탈정치화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정체성 그 자체를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한다.’

여성,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 최근 국내 인권운동의 핵심은 관용의 거절이고, 혐오는 이 거절에 대한 분노임을(아직은 만만하니까) 기자는 저 ‘탈시설운동’ 영상에 달린, 영상과 상관없는 댓글을 보고 생각했다(진의를 모르면 분노하지 않는다).

소수자들은 이제 ‘내가 너와 같은 사람이니 나도 네가 갖는 권리를 갖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인권운동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가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권리를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사회참여 기회를 받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도록 노력하자.’ 3·8 여성의 날에 여성단체가 외친 구호, 여성이 남성 임금의 63%만 받는 현실을 비꼰 ‘오후 3시 조기 퇴근’ 시위는 이런 맥락에서 비롯됐다. 각종 페미니즘 인터넷 카페의 미러링은 남성과 똑같은 화법을 구사해 남성을 주류에서 배제하거나, 성적 대상화하는 게 핵심이다.

“인권 동영상을 비난하는 분들과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송 활동가의 말을 듣고, 소통하면 할수록 한동안 혐오는 더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약자가 관용의 대상이길 거부한 시대에 스스로를 관용 주체라 믿는 이들의 분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5일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한 인터뷰에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읽고 기겁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제일 불쌍한 건 41년생 이명박”이라고 말했다. 3일 같은 당 이언주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난민) 문제는 먹고 살만한 혹은 잘나가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교수 등이 아무리 얘기해봐야 설득력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난민이나 외국인노동자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추상적인 문제”라고 썼다.

분노로 민심을 자극하며 존재감을 만드는, 그들이 낮게 갈 때 ‘더 낮게 가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달라진 세상에서, 언제까지 혐오를 자산으로 삼을 텐가.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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