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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아이와 둘이 미국에서 1년간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동양인이 많지 않은 미국 동남부 한 작은 해안 도시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3학년을 다녔던 아이는 또래 현지 친구들과 엄마들에게 ‘수학 좀 하는 아이’로 알려졌다. 솔직히 아이가 수학에 정말 뛰어난 것 같진 않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한국 수학 교육과정이 미국보다 조금 빠른 덕을 본 듯하다.

미국 학교 교실에서 아이가 처음 접한 수학은 구구단이었다. 담임 교사가 나눠준 인쇄물엔 ‘3X4=’, ‘4X5=’ 같은 문제들이 빼곡했다. 1, 2학년 때 이미 구구단을 다 익힌 한국 초등학생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가장 먼저 풀이를 끝낸 자신의 인쇄물이 빨간색 동그라미로 가득 채워지자 반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풀었냐며 부러워했다는 얘길 무용담처럼 전하며 아이는 신났었다. 그렇게 아이는 ‘영어는 못 하지만 수학은 잘 하는 친구’가 됐다.

비단 우리 아이만 겪은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온 상당수 아이들이 미국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수학 우등생이 된다. 그렇다고 미국 초등학교 수학교육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거나, 한국 학교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학년 말쯤 되니 미국 학교 수학도 한국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많은 부분이 유사해졌다. 일부 도형 관련 내용은 오히려 한국의 고학년 교과과정에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국내 일부 학부모들이나 교육자들 사이에선 우리나라 수학 교과과정이 너무 어렵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적지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너무 많은 내용을 배우는 바람에 ‘수포자(수학 공부를 포기한 사람)’가 계속해서 양산된다는 것이다. 공교육이 수학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면 더 많은 아이들이 수학에 대해 흥미를 느낄 거라는 기대도 있다.

현재 공교육에서 쓰이는 초등학교 수학 교재는 개념을 설명한 본 교과서와 문제풀이 위주의 익힘책으로 구성돼 있다. 6년 동안 수학 교과서와 익힘책이 다루는 내용은 △자연수와 분수, 소수의 사칙연산 △도형의 개념과 넓이, 둘레 계산법 △길이와 면적, 부피의 단위들 △반복되는 수나 모양 등에서 규칙을 찾는 방법 △표와 그래프를 읽고 그리는 방법 △비례의 의미와 비율을 구하는 과정 등이다.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상식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1980년대 국민학교를 다닌 엄마아빠 세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책을 읽고, 상당 수준의 작문 실력까지 요구 받는다. 당시엔 상상도 못했던 컴퓨터와 온라인 세상에도 일찌감치 노출된다. 그만큼 많은 글과 정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접한다는 점에서 공교육이 가르치는 수학이 아이들에게 과하거나 불필요하다고 보기 어렵다. 수학 교과서도 옛날처럼 딱딱하게 숫자만 나열돼 있지 않고 많은 부분이 그림이나 이야기 방식으로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

아이들이 ‘너무 많은, 너무 어려운’ 수학을 배우는 곳은 주로 학교 안이 아니라 학교 밖이다. 학교 안에선 상식 수준인 수학이 사교육과 선행학습 현장으로 옮겨가면 180도 달라진다. 사교육 시장에는 언제부터인지 ‘사고력 수학’이라는 정체 모를 이름이 등장했다. 수학이란 과목 자체가 사고력을 길러주는 게 주요 목적인데, 마치 전혀 다른 수학인 것처럼 홍보한다. 공교육의 수학 교과과정은 단순 개념일 뿐이라, 수준 높은 사고력을 키우려면 사교육을 추가로 받아야 한다는 유혹을 학부모들은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사고력 수학 학원이 가르치는 내용들은 대부분 옛날로 치면 응용 문제다. 그런데 교과서 내용을 해당 학년 수준에서 살짝 응용한 정도가 아니라, 학년 수준을 넘어선 내용을 섞어 어렵게 만든 다. 학교에선 3분의 1, 4와 5분의 1 같은 간단한 분수를 배우는 아이들이 사고력 수학 학원에선 몇천분의 1, 몇만분의 1을 계산해야 한다. 등 떠밀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수학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 밖에 없다.

이공계 출신이면서 교육자는 아닌 탓에 수학 학습 분량이나 난이도를 바라보는 내 판단이 잘못됐을 수 있다. 하지만 수학 교과과정이 과한지 적절한지 따지기 전에 공교육과 사교육 수학 간 괴리를 줄일 방안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학교 안과 학교 밖 수학의 격차를 지금처럼 방치하는 한 수포자는 끊임 없이 생겨날 테니 말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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