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팩트체크’의 무력감

입력
2019.02.27 18:00
수정
2019.02.27 18:1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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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아닌 주장만 횡행한 한국당 경선

거짓 주장이 되레 표 결집 문제 노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 선동 못 막아

자유한국당 차기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가 끝났다. 경선 기간 후보 주장들은 거의 매일 언론의 ‘팩트체크’ 소재가 됐다. 대표로 선출된 황교안 후보는 21일 최순실 태블릿 PC 조작 가능성을 묻는 경쟁 후보의 질문에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고 있다”며 “조사가 충분히 됐고,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취지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같은 주장을 한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징역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고, 언론은 이를 근거로 황 대표 주장이 거짓이라고 보도했다.

황 대표는 19일에는 “박 전 대통령 탄핵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박 전 대통령이 돈 한 푼 받은 것도 입증 안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언론은 탄핵 심판은 형사재판 결과와 무관하게 대통령직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황 대표가 이를 모를 리 없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이 대신 받은 ‘제3자 뇌물’로 인해 2심까지 유죄를 받았다.

한국당 당대표 선거에서 선전한 김진태 후보는 “5ㆍ18 유공자 명단은 좀 공개해야 하겠다, 그렇게 해서 투명하게 하는 게 좋겠다”며 일부 극우세력들의 5ㆍ18 유공자 관련 의혹설을 두둔했다. 역시 언론은 팩트체크를 통해 국가 유공자의 개인정보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대법원 판례라는 점, 5ㆍ18 유공자 심사위원회는 이전 정권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언론의 팩트체크에 거짓 주장을 거듭한 정치인이 타격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득표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팩트’가 사람들의 판단에 중요 기준이 되긴 하는 걸까.

어쩌면 정치인들은 “말의 효용성은 듣는 이가 원하는 걸 전달하는 데 있지, 정확성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는 ‘진실’을 간파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실었다. 미 스탠퍼드 대학이 낯선 이로 구성된 1,000쌍을 대상으로 5분간 대화를 하게 하고, 그 내용을 분석했다. 그 결과 둘 간의 대화에서 팩트를 전달하는 말은 36%에 그쳤으며, 19%는 “으응” 같은 호응, 5%는 “맞아” 등 동의, 2%는 “알겠어” 같이 고마움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대화 목적은 정보의 교환만큼 상대방과의 교감이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이런 속성을 무시하고 상대방 말 한마디 한마디의 진실성을 캐묻는다면, 까칠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말의 속성을 가장 잘 이용하는 정치인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말 트위터에 “오바마 전 대통령이 워싱턴D.C의 저택에 3m 높이의 담을 둘렀다. 그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조치에 동의한다. 미국에는 좀 더 큰 버전의 담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언론은 즉시 “오바마의 집에는 그런 담이 없다”며 팩트체크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트럼프가 “미국과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위해 민주당이 예산을 통과해줘야 한다”는 자신 주장을 지지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 후였다.

어제 오늘, 남북한 주민들뿐 아니라 전 세계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에 주목하고 있다.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들이 정파적 이해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내놓을 것이고, 독자들은 그 속에서 정확한 정보를 찾기 위해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말과 글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엔 부족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좀 더 정확한 팩트를 찾으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들도 있다.

핵 없는 한반도와 남북 교류 활성화를 위한 노력 역시 포기가 허용되지 않는 문제다. ‘말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도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며 “서두르지 않겠다”고 북핵 협상이 단기간 내 매듭지어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양 정상의 말을 곱씹어 그 속에서 팩트와 함께 희망을 찾는 노력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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