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못하면 새장 속 새보다 못해” 민초들은 더 결연했다

입력
2019.02.26 04:40
1면
구독

 평북 선천 등 만세운동 가담 13인이 무죄 주장한 항소이유서 공개 

 병원 직원ㆍ기생ㆍ머슴 등 기미독립선언서 못지 않은 결기 보여줘 

1919년 3ㆍ1 운동에 가담했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 받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 농민 서형묵이 일제 고등법원에 제출한 항소 이유서. 국가기록원 제공
1919년 3ㆍ1 운동에 가담했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 받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 농민 서형묵이 일제 고등법원에 제출한 항소 이유서. 국가기록원 제공

“새장 속에 외로운 새가 새장을 열 때 기쁘게 날아감은 새의 본성인데, 우리들도 이때를 맞이하여 독립을 하지 못한다면 새보다도 못한 것이다. 어찌하여 사람으로서 새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평안북도 미동병원 직원 한준겸(41)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 법정에 제출한 ‘상고취의’(항소 이유서)다. 그는 1919년 3월 평북 선천면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어 독립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일제 법정에 선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식인도, 명망가도 아닌 그는 무명의 독립 투사였다. 국가기록원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불러 낸 이름들 중 하나다.

25일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자료와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일제 고등법원 판결문 45건에는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민초들의 독립운동 활약상과 펄펄 끓는 독립 의지가 담겨 있다. 기생, 머슴, 시각장애인 안마사, 여인숙 주인, 전당포 업자, 짚신 장수 등 대개 ‘미천한’ 신분이었던 그들은 법정에서 일제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통렬하게 논파했다. 한 명 한 명의 항소 이유서가 완결된 독립선언문과도 같았다.

3ㆍ1 만세 운동엔 어린 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3ㆍ1 만세 운동엔 어린 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기름을 물에 합한다고 어찌 섞이겠는가. 야생오리를 집에서 기른다고 어찌 길들여지겠는가. 산 자, 죽은 자가 함께 7년의 큰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려 온 것은 조선독립의 4글자인 고로, 조선 민족 중 정신병자 외에 독립만세의 선동을 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 평안남도 평원 출신 농민 서형묵(43)이 써 낸 항소 이유서다. 평안북도 철산의 이발사 박응수(32)는 “부자유, 불합리한 합병에 강요당한 우리 민족이 독립을 부르고 자결을 주장함은 순리이고 정당한 도리인데, 무엇으로 이것을 비리라고 하는가”라며 일제 법정을 규탄했다. 황해도 신천 농민 김명성(36)은 “나는 본래 우매한 일개 농민으로 교회 혹은 사회활동은 아는 바 없으나, 이 시대를 맞아 삼척 동자는 물론 길거리 걸인이라 하더라도 독립 만세를 부르는 터에 어찌 입을 닫고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맞섰다.

3ㆍ1 만세 운동엔 어린 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3ㆍ1 만세 운동엔 어린 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당시 민중은 목숨을 걸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경기 평택 진위의 쌀장수 이도상(30)은 평택 시장에서 열린 만세 운동 동참을 결심한 뒤 “바로 체포될 것이고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 달라”고 이웃들에 부탁하고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그만 둘 수 없다”는 결의를 밝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성들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경북 영덕의 윤악이는 장터에서 “우리는 여성이지만 조선 만세를 외쳐야 한다”고 연설했다. 경남 통영의 기생 정막례(21)는 금반지를 판 돈으로 기생조합 동료 5명과 옷을 맞춰 입고 만세 행렬에 참가했다. 판결문엔 “정막례 일행이 선두에 서서 수천 명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당시 남성 조선인은 모자를, 여성 조선인은 치마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만세를 절규했다”고 적혀 있다.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전시에서 일제시대 무명씨들의 이 같은 독립 운동 기록 중 일부를 볼 수 있다. 이소연 국가기록원 원장은 25일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은 영웅들이었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