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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기업이 미래다] 원덕현 블랭코브 디자이너
경영학 전공 포기 후 맨땅에 헤딩
패션 선진국 프랑스ㆍ일본 진출
아내 문미영씨가 편집숍 운영 등 동업자 역할
[저작권 한국일보] 편집숍 ‘슬로우 스테디 클럽’, 패션 브랜드 ‘블랭코브’ ‘네이더스’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원덕현(왼쪽)과 조력자이자 동업자인 아내 문미영씨. 원 디자이너는 “저는 무언가를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고, 와이프는 사업 수완이 좋다”며 “내가 먼저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23일 일본 모리오카 시내의 한 쇼핑몰. 내부에 자리 잡은 한 카페에 일본인 80여명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다름아닌 한국에서 온 디자이너 겸 디렉터 원덕현(34)을 만나기 위해. 이들은 ‘선착순으로 티켓까지 구매했다’며 설렘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입장권 가격만 자그마치 3만원. 한국에서조차 이름이 낯선 디자이너가 일본에서 팬미팅이라도 하는 것일까.

이날 쇼핑몰에선 원덕현 디자이너의 가방 브랜드 ‘블랭코브’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2016년 일본으로 진출한 후 그는 주목 받는 해외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팝업스토어가 열린 이날 쇼핑몰 측은 블랭코브에 대한 고객들 문의가 빗발치자 원 디자이너와 고객들 만남을 적극 주선했다. 어떤 브랜드이며 누가 디자인했는지 궁금해하는 고객들이 많아 아예 원 디자이너를 초청해 토크쇼처럼 진행하는 이벤트를 열어 고객들 궁금증을 직접 풀어주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예상대로 입장권이 매진될 만큼 반응은 꽤나 좋았다.

최근 원 디자이너는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편집숍 ‘슬로우 스테디 클럽’에서 본보 기자를 만나 “일본에서 한국의 대중적이지 않은 브랜드를 소개한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제 브랜드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고 뜨거운 그들의 반응에 또한 감동했다”고 말했다. 블랭코브는 현재 오사카와 모리오카에 진출해 일본 고객들을 만나고 있다. 작년에는 도쿄에서 팝업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2017년에는 패션의 나라 프랑스에도 진출했다. 파리에서 명품숍 등이 밀집한 마레지구의 편집숍에 입점하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점차 인지도를 넓혀가는 중이다.

“원래는 러시아와 벨기에, 중국, 홍콩 등에도 블랭코브가 진출했었습니다. 하지만 ‘쇼룸 비즈니스’(해외 바이어들이 직접 회사를 찾아가 의류 등 제품을 확인하고 계약하는 것)를 중단하면서 저절로 나오게(철수하게) 됐죠. 사실 나라별로 이동하며 비즈니스를 하는 게 만만치 않아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거든요. 차라리 그렇게 들어가는 비용을 우리 브랜드에 더 투자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편집숍 ‘슬로우 스테디 클럽’ 1호점. 1층은 편집숍, 2층은 카페와 갤러리, 3층은 루프탑으로 꾸몄다. 원덕현 디자이너와 이동욱 건축가가 함께 디자인했다. 슬로우 스테디 클럽 제공
‘슬로우 스테디 클럽’ 내부 모습. 슬로우 스테디 클럽 제공

원 디자이너는 패션업계뿐 아니라 ‘패션 좀 안다’ 하는 ‘패피’(패션 피플의 줄임말)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유명인사다. 블랭코브 외에도 의류 브랜드 ‘네이더스’를 론칭해 많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사실 블랭코브를 가방, 의류 브랜드라고 딱 정해 부르기도 어색하다. 가방으로 시작한 블랭코브는 현재 여러 소품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제품들을 내놓고 있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로 만들었던 게 가방이었을 뿐이다. 작은 돌고래가 브랜드 마크인 네이더스도 옷뿐 아니라 모자와 스카프, 주얼리 등 제품 카테고리를 넓혀가는 중이다.

지금이야 제법 성공한 디자이너 혹은 사업가로 보이지만 원 디자이너는 ‘맨땅에 헤딩’ 하듯 패션계에 입문했다. 2011년 블랭코브가 탄생하기까지 그는 패션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전공하던 경영학을 중간에 그만 두고 고등학교 시절 품어온 디자이너라는 꿈만을 가지고 도전을 선택했을 뿐, 애초에 미술이나 디자인, 패션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도움을 청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친척이나 지인 등 아는 이 중 패션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의 반대는 어쩌면 당연했다. 원 디자이너는 “부모님은 패션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다못해 2년 안에 성과를 내겠다. 만약 실패하면 원하시는 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며 돈이 없어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간혹 편의점 도시락에 무료 음료 쿠폰 스티커가 붙어 있는 날이면 그저 행복했다고 그는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고생하다 2년 간 잉태하고 있던 블랭코브가 마침내 세상에 나오면서 그는 마침내 디자이너가 됐다. 기획과 디자인, 생산, 유통 등 모든 과정을 혼자 스스로 하면서 길을 닦아 나갔다. 지금은 ‘슬로우 스테디 클럽’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블랭코브와 네이더스를 판매하고 있다. 슬로우 스테디 클럽은 2014년 10월 서울 삼청동에 1호점, 지난해 1월 성수동에 2호점을 냈다.

사세를 한창 불려나가는 지금은 다행히 외롭지가 않다. 2013년 디자인을 전공한 아내 문미영(39)씨와 결혼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는 길을 함께 걷고 있다. 그는 패션업계에서 일했던 아내 덕에 편집숍 운영 및 비즈니스에서는 살짝 손을 뗄 수 있게 됐다. 오로지 제품 기획이나 디자인에 몰두하며 서울 안국동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씨름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사업 수완이 좋은 아내 문씨는 이런 남편에게 따끔한 조언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동업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문씨는 “남편은 한 번 마음 먹은 건 꼭 하는 사람이라, 위험을 줄일 수 있도록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하는데, 그게 바로 제 몫”이라고 말했다.

올 하반기에는 스포츠브랜드 뉴발란스와 세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원 디자이너가 직접 기획한 ‘호텔990’ 프로젝트다. ‘리미티드 에디션’ 개념으로 티셔츠나 재킷 등 의류뿐 아니라 여행이나 라이프스타일 컨셉트 제품들을 기획해 내놓을 생각이다. 업계와 소비자들에게 반응이 좋아 벌써 3년째 이어오고 있는 프로젝트다.

이 정도면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서 자신 있게 성공했다 말할 수 있을 텐데, 원 디자이너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덧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루지 못한 게 더 많습니다. 다만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걸 전하고는 싶어요. 앞으로 더 잘 되면 후배들을 양성하는 꿈도 가지고 있어요. 언제쯤 가능하냐고요? 한 50년쯤 뒤?” 그가 활짝 웃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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