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칼럼] 일어나지 못한 사건 - 김수영 1

입력
2019.02.21 04:40
수정
2019.03.20 13:29
29면

1921년생인 김수영은 일제 식민 시대에 태어났다. 이 시대의 청년학생이라면 누구나 식민치하에 대한 울분과 독립 투쟁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그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민족의식이 없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다녔던 선린상업학교 시절부터 영어와 일본어에 뛰어났다. 김수영의 출중한 어학 능력은 훗날 그를 두 군데의 사지(인천 포로수용소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부터 구출해 주었고, 번역으로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짧은 일본 유학 시절, 김수영은 엘리엇ㆍ오든ㆍ스펜서 등의 영미 시인과 니시와키 준사부로ㆍ미요시 다쓰지ㆍ무라노 시로 등의 일본 시인을 탐독했다. 그러나 연극에 빠져있었던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해방이 되고난 후부터다.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대부분의 지식인 남성이 그랬듯이 그도 한국어를 일상어로 썼지만, 지식 습득이나 추상적인 사고 활동은 일본어로 하는 이중언어 사용자였다. 그런 탓에 그는 일본어로 먼저 구상을 하고 한국어로 번역을 하는 방식으로 시를 쓰거나, 아예 초고를 일본어로 썼다. 그와 연배가 비슷한 소설가ㆍ시인들이 국어에 익숙해지면서 일본어는 물론 일본 문학으로부터 점점 자립적이 되어간 반면, 김수영은 그런 시대 변화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극렬하게 저항했다.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 2001)을 쓴 최하림은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라는 구절로 유명한 김수영의 시 ‘가다오 나가다오’를 인용하고 나서 이런 해설을 달았다. “우리는 여기서 무한자유를 요구하는 급진주의자였으며 문학적으로는 초현실주의자였던 김수영이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적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것을 유감없이 볼 수 있다. 그것이 한국현대의 정신적 저층구조였다.” 하지만 김수영의 정신적 저층구조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멀다.

김수영은 1960년대 중반에 잡지와 신문에서 활발한 시 월평 작업을 펼쳤다. 이때 그는 한국 문단이 외면하고 은폐하려는 일본 문학의 존재를 보란 듯이 노출시키면서, 일본 문학에 자신이 연루되는 것에도 괘의하지 않았다. “모 문학잡지사에 가서 오래간만에 일본 문학지를 들춰보다가 ‘분가쿠카이’에 나온 시 평론을 읽어보았다.”, “박목월의 ‘동물시초’를 읽고 대뜸 일본의 동물시인 히라다를 연상하고 후자의 작품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김수영은 한국의 후진적 현대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본 시단을 참조했다.

1966년 2월, 김수영은 문학 평론가 김철이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뿌리와이파리, 2018)에서 “한국문학사상 전무후무한 이 사건”이라고 부른 ‘불발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어느 문학잡지로부터 시와 시인의 근황을 소개하는 ‘시작 노트’를 함께 청탁 받았는데, 원고지 10매가 훌쩍 넘는 시작 노트를 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써서 냈다. 잡지사가 한글로 번역을 해서 실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발표했다면 잡지사는 폐간을 당하고 광화문에서는 김수영의 화영식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는 왜 저런 무모한 곤조(근성ㆍこんじょう)를 부렸을까? 시인은 모국어를 지키는 목자(牧者)이자 전사여야 하는데 말이다.

김수영의 진단에 따르면, 해방 후 한국이 맞이한 지적 허약성의 원인은 두 가지다. ‘알짜’ 지식인이 모두 월북했다는 사정과 일본어 독해 능력으로 축적된 지식계가 일시에 살처분 되었다는 것. 영어 지식을 수입할 수 있는 역량은 미처 마련되지 못했는데 지식의 저장고인 일본어는 금지됐다는 것. 김수영은 쇄국주의적 문화정책과 독단적인 민족주의, 일방적인 배미사상(拜美思想)을 해방 후 한국의 지적 기초 역량을 피폐하게 만든 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저 사산된 사건을 통해 반일(反日)의 허구성과 불가능성을 위악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민족주의ㆍ민중ㆍ참여시와 대척에 있는 김수영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아직 제대로 탐구되지 않았다. 국어는 외래어에 오염되는 것으로 지탱하며, 외국 단어 활용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일어나지 못한 사건과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 이은재 의원, 간바레!(힘내라ㆍがんばれ)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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