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재판개입 거부하고… 판결 지켜낸 소신 판사들

입력
2019.02.19 04:40
수정
2019.02.24 14:24
11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파기환송심

통진당 시의원 퇴직 취소 소송 등

재판장에 저항 법원 자존심 살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를 동원해 개입했던 재판은 대체로 양 전 대법원장의 의중을 반영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100%는 아니었다. 양 전 대법원장 공소사실 등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의 부당한 지시와 개입을 거부하고 소신을 지킨 재판부가 없지 않았다. 특히 일부 배석판사들은 양승태 사법부의 지시에 굴복하는 재판장을 비판하고 재판 개입을 막아냄으로써 법원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에 저항했던 대표적 사례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파기환송심. 당시 서울고법 형사7부 재판장이던 김시철 부장판사는 수뇌부 의중에 따라 무죄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 검사ㆍ변호인 문답 ‘시나리오’를 준비해 심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죄 판결문 초안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주심이자 배석(부장급)이던 최현종 고법판사는 끝까지 유죄 판단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 부장판사는 최 판사의 반대로 무죄 선고를 하지 못한 채 2017년 2월 정기인사로 교체됐다. 이후 원 전 원장 사건을 넘겨받은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하고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다.

지방법원에서도 배석판사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구 통합진보당 소속 시의원 등이 퇴직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하자, “(각하가 아닌) 본안 판단이 필요하고, 그 결론은 원고 청구기각(의원직 상실)으로 한다”는 지시를 재판부에 전달하도록 조치했다. 대법원장의 뜻을 전달받은 광주지법 행정1부 재판장 박강회 부장판사는 이미 청구인용(의원직 유지) 판결을 선고하기로 배석들과 합의를 마친 상태였음에도 “청구기각을 재검토해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장우석ㆍ류지원 두 배석들의 반대로 결국 최종 합의에 실패하고 결론을 다음 재판부로 넘겨야 했다.

“의원직을 박탈하라”는 요구는 후임 재판부에도 강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후임 재판장인 박길성 부장판사는 김선숙ㆍ정철희 배석들의 의견 등을 고려해 청구인용을 선고했다. 법원 내부에선 박길성 부장판사에 대해 “그 역시 행정처 지시가 부당하다고 보고 배석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노력을 하는 등 대쪽 같은 기개를 보였다”고 전하기도 했다.

배석들과 뜻을 함께 했건, 그들의 의지에 막혔건, 결과적으로 두 부장판사는 행정처에 찍히면서 고법 부장 승진에 나란히 실패했다. 실제로 박강회ㆍ박길성 부장판사는 이후 검찰 조사에서 “고법부장 승진 인사를 앞두고 행정처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경우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개인적 차원의 예감이 아니라, 실존하는 행정처 인사 권력이 부정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했던 것이다.

양승태 사법부의 컨트롤 타워인 대법원에서도 일부 판사들이 소신을 지켰다. 2015년 5월 고영한 당시 대법관의 법률적 판단을 보좌했던 한애라 재판연구관의 경우, “교원노조법 합헌 결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관련 사건을 파기해 항소심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문 초고 작성 지시를 거부했다고 한다. “관련 헌재 선고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을 예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한 재판연구관에게 가로막혔던 이 사건은 결국 헌재에서 합헌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장관의 재항고를 근거로 대법원은 끝내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사법농단’ 수사팀 주변에서는 “고법이나 지법 부장 이상 고위 판사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수뇌부의 부당한 개입을 외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수사팀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판사는 "일부 배석 판사의 저항을 비롯한 재판부 내부의 갈등은 향후 재판 과정에서 고위법관들의 범죄 고의성을 밝히는 데 결정적 변수가 될 수도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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