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고삐 풀린 미중 핵 군비 경쟁

입력
2019.02.13 18:00
수정
2019.02.13 18:1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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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중거리핵전력(INF)조약 사실상 탈퇴

한반도, 미중 핵미사일 각축장 될 위기

유럽처럼 아시아판 신INF조약 추진해야

“나는 핵무기 감축 협상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를 이른 시일 안에 만나 하루 만이라도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1986년 9월 15일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같은 해 12월 11일부터 이틀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세기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이 자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양국의 전략 핵무기를 50% 감축하고, 사거리 500~5,500㎞ 미사일 등 유럽의 지상 발사 중거리핵전력(INF)도 완전히 제거하자는 파격적 제안을 했다. 사실 소련의 가장 큰 걱정은 미국이 소련의 SS-20 등에 맞서 유럽에 배치한 중거리 지대지 핵미사일 ‘퍼싱Ⅱ’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이 핵미사일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 동맹국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보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INF를 제거해야 한다는 역제안을 내놨다. 결국 두 사람은 아시아 지역의 INF와 전략방위구상(SDI) 등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빈손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계속된 막후 협상에서 소련은 결국 아시아 지역의 INF 폐기에도 동의하게 됐다. 87년 12월 8일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INF조약에 서명했다. 이후 양국은 91년까지 2,692기의 핵 미사일을 폐기했다. 이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도 체결했다. 한때 절멸의 위기에 내몰렸던 인류는 이렇게 군비 경쟁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 평화를 꿈꾸게 됐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유럽뿐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이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 공포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레이건 전 대통령과 INF조약 덕분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우호적 환경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미국과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INF조약을 깼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백악관 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중대한 조약 위반을 이유로 6개월 후 INF조약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미국이 INF조약 이행을 중단한 만큼 우리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INF조약은 중국의 부상으로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든 상황이다. INF조약이 체결될 때만 해도 미국과 소련이 세계 1,2위 국가였지만 지금은 중국이 옛 소련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INF조약 당사자가 아니어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INF를 대거 개발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조약에 발목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어느새 아시아 전 지역을 겨누는 INF의 실전 배치까지 끝마쳤다. 특히 중국의 둥펑(東風ㆍDF) 계열 핵미사일 가운데 DF-21D는 사거리가 2,700㎞에 달해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태평양 미 항공모함 전단까지 타격할 수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국이 INF조약에서 서둘러 탈퇴한 진짜 이유다.

80년대 말 유럽과 아시아는 INF조약으로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조약은 유명무실해졌다. 중국의 부상을 감안하면 INF조약 파기로 가장 위태로워진 곳은 동북아다. 미중을 당사자로 끌어 들여 아시아판 신(新) INF조약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니면 동북아는 미중 무한 군비 경쟁 시대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벌써 ‘선제적 핵무기 사용 금지’ 노선을 재검토할 수 있다는 운을 떼고 있다. 올해 국방 예산은 200조원도 넘게 책정할 전망이다. 전쟁할 수 있는 ‘정상 국가’를 꿈꾸는 일본 우익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북한도 INF조약에서 탈퇴한 미국을 ‘내로남불’로 비판하며 완전한 비핵화에서 도망치려 할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가 미중 핵 군비 경쟁의 한복판에 서게 됐는데도 우리 외교부는 “미국이 제반 상황을 감안해 결정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어느 나라 외교부인지 모르겠다. 고민도, 전략도 안 보인다.

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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