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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만에 상업 영화 복귀 “좀비 세상서 오히려 인간성 회복 묘미” 
코미디 좀비 영화 ‘기묘한 가족’으로 돌아온 정재영은 “좀비물이 한국에서도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며 “소재의 다양성 면에서 반갑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꼭 죄인이 된 것 같은 심정이에요. 자꾸만 입이 마르네요. 으하하.” 연기 경력 23년을 자랑하는 베테랑 명배우도 ‘영화’라는 두 글자 앞에선 바짝 긴장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스크린이라 더 그렇다. 저예산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이후로 2년 만, 상업 영화로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2015) 이후 4년 만의 복귀다. 코미디 영화 ‘기묘한 가족’(13일 개봉)으로 관객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는 배우 정재영(49)을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마주했다.

‘기묘한 가족’은 평화로운 충청도 농촌 마을에 좀비가 나타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느 좀비물과는 다르다. 좀비에게 물리면 죽기는커녕 회춘하고, 좀비가 사람 말귀도 알아듣는다. 망해가는 주유소를 운영하는 한 가족이 우연히 좀비를 집안에 들이면서 마을에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정재영은 극의 중심인 맏아들 준걸 역을 맡았다. 정재영은 “배우와 스태프가 똘똘 뭉쳐 즐겁게 작업했다”며 “관객에게도 기분 좋게 다가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수한 ‘아재 취향’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좀비물 마니아’란다. 좀비 영화의 시초 격인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부터 최근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까지 거의 모든 좀비 영상물을 섭렵했다. 좀비의 계보 및 변천사도 줄줄 꿴다. ‘이것은 인터뷰인가 특강인가.’ 마니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전문 지식이 끝도 없이 풀려 나왔다.

“영화 ‘부산행’(2016) 덕분에 좀비가 한국에 제대로 상륙했어요. 대중은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됐죠. 좀비 소재를 코미디로 풀어낸 시나리오가 정말 반가웠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재영이 ‘기묘한 가족’에 흔쾌히 출연한 이유다. 정재영은 “가족이 좀비가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족을 죽일 수도 살려둘 수도 없는 딜레마를 영화가 재치 있게 풀어냈다”며 관전 포인트도 귀띔했다.

사람을 회춘시키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좀비를 집안에 들인 준걸(왼쪽)과 가족들은 좀비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선다.

좀비는 현대사회의 소비 자본주의와 인간 소외를 비판하는 매개로 태생부터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다. 정재영의 목소리가 달아올랐다. “제가 좀비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들이 오히려 인간성을 회복하잖아요. 우리 영화도 주제의식이 가볍지만은 않아요. 다만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정재영도 좀비 역을 슬쩍 탐내 봤지만 신예 정가람에게 맡겨졌다. “내가 좀비가 돼서 사람들에게 달려들면 ‘진짜 습격’이잖아요. 우리 영화는 코미디인데 나 때문에 정통 좀비물이 돼 버리면 안 되니까. 우하하. 가람이가 매번 2시간씩 분장 하는 걸 보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이끼’(2010)에서 노역 분장 해봐서 잘 알아요. 이물감 때문에 몰입도 어렵고 쉽게 피로해지거든요. 힘든 여건에서도 늘 씩씩한 가람이가 정말 기특했어요.”

이 대목에서 정재영이 돌연 “사실은 나도 특수분장을 했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쳤다. “제가 워낙 차가운 도시 이미지라서. 순박한 인상을 연출하기 위해 분장실장이 엄청 고생했다는 후문이… 크하하.”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만 마냥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건, 어느 작품에서든 캐릭터 그 자체가 돼 버리는 정재영의 빼어난 연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실제로 충청도 어느 마을에 사는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사투리 연습에 오랜 시간 매달렸다. 이런 노력들이 그를 ‘생활 연기의 대가’로 만들었다. “제가 가장 듣고 싶은 말, 들었을 때 가장 기분 좋은 말이 ‘연기가 아니라 진짜 그 인물로 보인다’는 말이에요. 제 연기의 목표이기도 하고요. 그건 장르와는 무관해요. 휴먼드라마든, 멜로든, SF 판타지든, 애니메이션이든 연기의 기본은 똑같죠.”

정재영은 올해 상반기 MBC ‘검법남녀’ 시즌2로 안방 시청자를 만난다.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정재영은 2년 전 여름 술을 끊었다.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찾아온 변화다.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에서 터를 닦은 정재영은 2015년 KBS 드라마 ‘어셈블리’로 첫 드라마를 경험한 이후 2017년 OCN ‘듀얼’과 지난해 MBC ‘검법남녀’까지 잇달아 안방 나들이를 했다. 지난해 연말엔 ‘검법남녀’로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술까지 마시니 체력이 달려서 안 되겠더라”며 “이제 술에 찌든 캐릭터는 실감나게 연기 못할 것 같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주로 얻은 여유로운 시간에 정재영은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정재영은 “예전엔 하던 일만 하고 시대에 많이 뒤쳐진 삶을 살았다”며 “자기 것만 고집해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기묘한 가족’ 같은 영화를 언제 또 해 보겠어요. 나중에 제 출연작을 돌아봤을 때 ‘다양함’이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막연한 희망이지만 꼭 이루고 싶네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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