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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여가 무산됐다. ‘투쟁과 교섭의 선순환’을 구축하고 ‘사업장 담장을 넘어 한국사회의 대개혁’으로 나가겠다던 포부가 무색하다.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이 제시됐다. 불안정한 리더십, 정파 갈등, 결정 장애에 빠진 의사결정 구조 등 내부 문제가 주로 지적됐다. 의미 있는 진단이거니와 100만 조합원을 거느린 내셔널센터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요인은 실력 부재다. 경사노위 참여는 단체교섭이나 총파업과는 다른 차원의 노동정치다. 기업이나 업종, 산업의 차원을 넘어 전국 단위에서 펼쳐지는 사회적 협의(concertation)는 협소한 노동문제를 넘어 경제, 산업, 교육 등 거시적 국가 전략과 정책을 개발하고 협상하는 고도의 정치다. 정책의 장(場)에서 경쟁하고 협력하는 과정인 만큼 그에 걸맞은 정책 역량이 요구된다.

정책 역량은 투쟁 역량과 다르다. 투쟁 역량은 성과를 유리하게 배분하거나 상대의 문제 제기에 맞서는 ‘대항적’ 역량이다. 반면, 정책 역량은 당장의 이익을 떠나 국가 차원의 성과를 창출하는 데 필요한 의제를 발굴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정책을 만들어내는 ‘형성적’ 역량이다. 정책행위자 관점에서 노동조합을 연구한 박명준 박사에 따르면, 정책 역량은 정책 개발에 필요한 인적ㆍ물적 자원 혹은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이를 동원해 양질의 정책을 생산해 내는 능력이다(‘노동조합의 정책역량에 관한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민주노총의 정책 역량은 낮은 수준이며 투자도 소홀하다. 실제 정책 개발 등을 담당하는 내부조직인 정책실과 정책연구원의 전문인력이 10명이 채 안 되고 한 해 예산도 2억원 남짓(전체 예산의 1.5% 수준)이다. 영국이나 독일 노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영국노총(TUC)의 경우 런던 본부와 지역본부에서 정책개발 등을 담당하는 전문위원이 100여명이고, 독일노총(DGB)도 정치, 경제, 교육, 여성, 청년 등 주요 분야 정책을 담당하는 전문가를 다수 고용하고 있다. 특히 독일노총은 산하 공익재단에 경제사회연구소(WSI)와 거시경제연구소(IMK)를 두어 정책개발 등 전문적 연구를 담당케 하고 있다(위 책, 207쪽).

경사노위에 대한 소극적 인식도 참여 무산의 원인 중 하나다. 의제 범위나 참여자 등 과거 노사정위원회보다 판이 훨씬 커진 대화 기구를 맘에 안 들면 언제라도 탈퇴해도 되는 정도의 ‘전술적 수단’으로만 사고하는 것은, 자신감 부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판단의 오류이기도 하다. 탈퇴에 따른 당장의 사회적 비난은 그만두고라도 조직 내부에서 겪어야 할 갈등과 혼란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 역량이나 인식의 부족도 문제지만, 투쟁 역량의 부족은 민주노총엔 더 큰 고민거리다. 위력적인 투쟁력에 자신이 있었다면, 경사노위 참여에 이보다는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투쟁 역량이 발언권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 노동법 투쟁 이후 민주노총은 한 번도 성공적 파업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총파업만 해도 16만을 동원하고도 얻은 것 없이 끝났다. 결국 이번 불참 결정은 민주노총의 전반적인 역량 부재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번 사건이 ‘사회적 대화 불가론’의 근거가 돼선 안 된다. 지역과 업종 차원에서의 노사정 협의가 이미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시장 모델을 넘어서는 고용 창출의 대안 모델을 제시했다. 오랜 연구와 타협을 위한 인내가 이룬 결실이다. 노사정과 함께 연구기관을 아우르는 ‘자동차산업 노사정 포럼’도 전문 역량을 갖추고 있기에 성과가 기대된다. 냉소보다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경험을 축적하고 정책 역량을 높여나간다면 머지않아 새로운 노동정치의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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