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기행] 4대째 고소한 향기 잇는 ‘기름진 가문’… 단골도 2ㆍ3대 이어져

입력
2019.02.08 20:29
20면

 천안 삼대기름집 

90년째 한자리를 지켜온 삼대기름집 전경. 이준호 기자
90년째 한자리를 지켜온 삼대기름집 전경. 이준호 기자

“고소한 참기름처럼 평생을 기름과 함께 한 기름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2일 오전 충남 천안시 사직동 남산시장 언덕배기 ‘작은 재빼기’ 끝자락에 자리잡은 ‘삼대기름집’. 이 곳은 4대가 90년째 한 곳에서 가업을 이어온 충남 천안의 대표적인 ‘노포’다.

20평 남짓한 기름집 안에 들어서자 주인 현원곤(67)씨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는 기름틀과 가래떡 기계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기름과 떡을 담아내고 있었다.

한 켠에 놓인 소파와 쪽 의자에는 50~70대 아낙네 20여명이 처음 만났음에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인 냥 이야기 꽃을 피우며 기름과 떡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설을 앞두고 참기름 들기름을 짜고, 가래떡을 뽑기 위해 쌀 자루와 깨 자루를 이고 지고 모여든 이들은 적게는 20년 많게는 60년 이상 이 기름집을 이용해온 단골들이다.

현원곤씨가 적게는 20년 많게는 60년 단골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준호 기자
현원곤씨가 적게는 20년 많게는 60년 단골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준호 기자

기름을 짜는 기계에서 ‘기름이 다 볶아 졌습니다’라는 음성안내가 나오면서 수증기를 내뿜자 기름틀에 다가간 홍순애(71)할머니는 “오늘은 얼마나 좋은 기름이 나왔을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기름틀 안을 살펴보았다. 여과기를 거쳐 흘러나온 고소한 기름냄새를 맡은 홍 할머니는 갓 짜낸 기름으로 가득한 소주병 5개가 나란히 줄을 이은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은 색깔이 더 예쁜 것이 아주 고소할 것 같아”라며 미소를 지었다.

갓 짜낸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가게 안에 퍼지고 있다. 이준호 기자
갓 짜낸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가게 안에 퍼지고 있다. 이준호 기자

기름틀 바로 옆 가래떡 기계에서는 뽀얀 김과 함께 떡틀의 구멍으로 가래떡이 뽑아져 나왔다. 김정국(74)할머니는 틀에서 나오는 떡을 한 움쿰 잡아 잘라낸 뒤 맛을 보며 “떡이 잘 나왔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씨는 “누님이 가져온 쌀이 좋고 떡 만들기 적당하게 잘 불려와서 떡 맛이 좋은 것이여”라며 화답했다. 김 할머니는 현씨가 초등학교 때부터 보아온 이웃이며 선대부터 60년 넘은 단골손님이다.

삼대기름집 3대 주인인 현원곤씨가 가래떡을 뽑기 위해 쌀을 빻고 있다. 이준호 기자
삼대기름집 3대 주인인 현원곤씨가 가래떡을 뽑기 위해 쌀을 빻고 있다. 이준호 기자

현씨의 아내 전유산(64)씨는 이들에게 요구르트와 건빵봉지를 건네며 가족처럼 대했다. 전씨는 “손님이 많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심심하지 않도록 간식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삼대기름집’의 역사는 1대 주인인 원곤씨의 할아버지 고 현재성씨(1966년 작고)가 1930년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열면서 90년 역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로부터 기름집을 물려받은 그의 아버지 고 현석민씨가 2대 주인으로 기름집을 운영하다 맏아들인 원곤씨가 물려받아 3대를 이어오고 있다.

삼대기름집 안주인 전유산씨가 손님에게 건빵과 요구르트를 건네고 있다. 이준호 기자
삼대기름집 안주인 전유산씨가 손님에게 건빵과 요구르트를 건네고 있다. 이준호 기자

3년전 아내 전유산씨가 암 투병을 시작하자 체육교사를 하던 아들 상훈(42)씨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고 가업을 잇겠다며 퇴직하고 뛰어들면서 4대째 가업이 전승되고 있다.

기름집은 한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개업 당시 자리를 지켜왔지만 대가 바뀔 때마다 상호가 바뀌었다.

개성에서 기름집을 했던 현씨의 할아버지는 천안으로 내려와 기름집을 개업했다. 개성에서 내려왔음을 알리기 위해 기름집 이름을 ‘개성기름집’ 이라고 지었다. 아버지 고 현재성씨가 2대 주인으로 뒤를 이으면서 천안 정착을 알린다는 의미로 ‘천안기름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현씨는 3대째 이어온 가업이 자랑스럽게 여겨 ‘삼대기름집’으로 바뀌었다.

왼쪽부터 기름집 4대를 이은 아들 상훈씨와 아내 전유산씨, 현원곤씨. 이준호 기자
왼쪽부터 기름집 4대를 이은 아들 상훈씨와 아내 전유산씨, 현원곤씨. 이준호 기자

그는 “기름집이 삼성 현대처럼 대단한 기업도 아니고 미미한 가내수공업이지만 가업을 이어온 사실을 누구에게도 자랑하고 싶었고 어떤 직장보다 소중한 일터였다”라며 “4대째 이어가는 전통만큼 기름 역시 최고의 품질임을 알리고 싶어 이름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은퇴하고 4대를 이은 아들이 운영을 도맡으면 아마 기름집 이름은 ‘사대기름집’으로 바뀔지 모른다”며 “아들 대에 100년 전통을 훌쩍 넘길 것 같다”고 말했다.

기름집은 원곤씨가 태어나면서부터 함께한 숙명 같은 공간이었다.

현씨는 “기름집 말고는 단 한번도 다른 일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소중한 곳” 이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하던 기름집은 나의 놀이터였고 세상의 전부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몸에는 기름집 유전자가 있다고 믿었던 그는 천안에서 고교를 마치고 잠시 집안 일을 돕다가 1972년 인천으로 올라가 자신의 기름방앗간을 열었다. 3년간 안정된 기반을 잡았지만 정리하고 천안으로 내려왔다. 자신이 떠나고 해가 지나면서 힘에 부친 연로한 부모님의 모습이 안타까워 혼자만 인천에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안에 내려온 그는 상호를 ‘삼대기름집’으로 바꾸고 기계도 현대식으로 교체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처음 기름집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디딜방아로 기름을 짰다. 깨를 빻아 장정 서너 명이 힘을 합해 볶은 깨가 담긴 목틀을 지렛대로 눌러 기름을 짜는 방식이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경영을 넘겨받은 뒤 밀려드는 주문과 체력소모가 많은 디딜방아 대신 발동기가 달린 기름 짜는 기계를 들여왔다.

그 역시 3대 주인이 되면서 과감하게 자동화 시설을 도입했다. 대를 거듭할 때마다 시설이 현대화하는 진화과정을 거친 것이다

현씨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40년 넘게 이어온 시설들을 자동화 시설로 전환한 이유는 간단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실한 모습에 단골이 늘어 하루에 많게는 15가마의 깨를 볶아 기름을 짜내야 했다. 아버지가 바꾼 발동기로는 물량을 처리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 무거운 깨자루 쌀자루와 함지박을 들었다 놨다 하는 반복 작업 과정은 허리에 무리를 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동 신형기계로 바꾸었다.

삼대기름집 내부 모습. 이준호 기자
삼대기름집 내부 모습. 이준호 기자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디딜방아를 발동기로 바꾸면서 걱정했듯이 그 역시 아버지가 설치했던 기계를 치우고 새 기계를 들이면서 기름 맛이 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기름 맛이 좋아지고 착즙량도 늘어 단골손님들이 더 좋아했다.

착즙량이 늘고 맛이 좋아진 이유는 간단했다.

새 기계의 성능이 좋아 착유량이 늘어난 점도 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 십 년간 이어온 원료인 깨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에 자동화 기계의 정밀함 더해져 옛 맛을 좀더 향상시킬 수 있었단다.

그는 고객이 들고 온 모든 깨를 세척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며 알곡의 상태를 파악한다.

엄지와 검지, 중지에 힘을 주어 손끝에서 깨가 으깨질 때 촉감으로 수분과 여문상태와 확인하고 볶는 정도와 화덕의 불 세기를 조절한다. 이 과정에서 기름의 양과 맛이 결정된다.

현씨 가문에서 이어오는 이 비법은 다른 사람이 알려 해도 알 수가 없다. 설령 알려준다 해도 짧은 시간에 내 것이 될 수 없다. 오롯이 손끝이 느끼는 감각을 오랜 시간 경험을 해야 만 체득할 수 있는 비법이다.

현씨는 “기계를 바꾼 이후 할아버지 때 깨 1말을 볶아 기름을 짜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였으나 지금은 3분이면 된다”며 “볶는 시간이 짧은 만큼 알곡 상태에 따른 불 조절과 온도와 시간 설정을 정확하게 해야 기름양도 많아지고 맛도 유지가 된다”고 말했다.

수입품과 저급 국산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맛 유지의 비결이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던 그는 40년 넘게 우리 깨를 고집하고 있다. 돈을 벌고자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중국산 깨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대를 이은 가업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들깨와 참깨는 천안농협에서 공급받았다. 구입한 원곡은 품질이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저온창고에 보관한 뒤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 내다 쓰고 있다.

천안시내에 수십 곳의 기름집이 있었으나 대형 공장에서 생산된 값싼 중국산에 밀려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삼대기름집은 신용과 명성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는 ‘믿음과 신용’ 이라는 좌우명을 액자에 담아 기름집 벽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전 한번씩 되 뇌인 후 일을 시작하고 있다.

“가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다닌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찾아올 때도 있는데 이들은 우리 집의 신용을 믿고 2대 3대가 함께 단골들”이라며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일과를 시작하기 전 벽에 걸린 좌우명을 꼭 읽고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름집 입구에 붙은 충청남도 가업승계기업, 천안시 전통업소 지정 현판. 이준호 기자
기름집 입구에 붙은 충청남도 가업승계기업, 천안시 전통업소 지정 현판. 이준호 기자

고집과 자부심으로 지켜온 기름집은 2016년 충남도로부터 소상공인가업계승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로 기름집 경력 3년차 인 아들 상훈씨는 매일 아버지로부터 깨 볶는 법과 알곡 선별 기술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착유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뒤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아직 손끝의 감각이 아버지의 경지에 이르지 안아 혹시라도 기름 맛이 달라질까 하는 우려에서다.

교사직을 내던지고 4대째 가업계승에 나선 상훈씨가 기름을 짜고 있다. 이준호 기자
교사직을 내던지고 4대째 가업계승에 나선 상훈씨가 기름을 짜고 있다. 이준호 기자

상훈씨는 2016년 기름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온라인 시장에도 진출을 시도했다. 전통시장의 한계를 넘고 소비자의 구매방식 변화에 맞게 지난해 3월부터 인터넷 판매(www.4dae.co.kr)를 개시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그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온라인 판매를 전담하고 있다.

부부가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함께 ‘기름진 인생길’에 들어 선 것은 함께 가업으로 이어온 기름집이 그만큼 소중했기에 결정한 것이다.

상훈씨는 “교사생활을 20년 정도 한 뒤에 가업을 이어 받을 생각이었지만 어머니의 병세가 심해시기를 앞당겼다” 며 “기름집은 놀이터와 같이 친숙한 곳으로 어깨너머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작업 과정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새 직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앞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기름집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는 “12살 아들이 시킨 것도 아닌데 여기에 오면 옆에서 기름 짜는 것을 거들어 주곤 한다”며 “아이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처럼 자연스럽게 기름집을 이어받아 5대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웃었다.

천안=글ㆍ사진 이준호 기자 junh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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