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

입력
2019.02.02 04:40
23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두렵다.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이 더 많았던 과거에서 비롯된 두려움일 것이다. 언젠가는 모두 되돌려 받겠지만, 뿌려 놓은 것을 아직도 전부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뿌려 놓은 것을 전부 거두어들였더라면 오늘의 삶을 이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할지 모른다. 모든 현상을 각자의 관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지난 시간은 부끄러운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 알게 모르게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기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기적이 가져다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틈만 나면 자신이 받은 상처만을 말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상처를 준 이들과 상황을 곱씹으며 원망하지만, 내게 상처받고 힘든 시간을 살아내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 급하다는 핑계로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는 제대로 정차를 하지 않아서, 건널목을 지나는 보행자를 멈춰서게 하는 우리다. 하지만 걸어서 건널목을 건너다가 정차하지 않는 차와 마주할 때면 우리는 분노한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는 창피함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간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위를 이용해 사익을 편취해도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고, 혹시 들켜도 법망을 피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맡겨진 직위에 주어진 권한과 영향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재수가 좋아 들키지 않았는지 아니면 재수가 없어 들켰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누가 이런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계치에 놓인 혈압, 당수치, 간 기능 수치 등이 적힌 건강검진 결과표를 받아보면 위기감을 느낀다. 그리고 지난 시간의 그릇된 생활 방식을 되돌아보며 임계치에 놓인 수치를 낮추기 위해 운동도 하고 식단도 조절한다. 하지만 임계치에 놓인 우리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되돌아볼 여유도, 마음도 없다. 때로는 한계치를 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기고, 때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계치를 높인다. 더 나아가, 한계치를 넘은 자신의 행동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잊혀지길 바란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임계치에 놓인 자신의 삐뚤어진 도덕성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치를 넘은 자신의 행동이 소리없이 묻히기를 바라는 기대감은 창피함에서 비롯된다. 창피함은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인지부조화에서 기인한 불편한 감정이다. 창피함을 느낀다는 것은 최소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통념적 견해는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인지부조화도 느끼지 못하는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모든 것은 법정이 밝혀 줄 것이라는 모습에는 당당함만이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때론 같은 실수를 수없이 반복하기도 한다. 진심을 담은 ‘미안하다’란 말 한마디면 끝날 일도 지루한 싸움으로 이어져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주변 이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지한 자기성찰과 진심을 담은 사과는 어디에도 없다. 잠시 맡겨진 것을 내 것인 양 착각하고 움켜쥐려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과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기회를 주는 데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주변에는 한없이 엄격한 도덕적 잣대에서 비롯된 문화 말이다.

뿌린 것들을 다 거둬들이는 그날, 추한 모습으로 추락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자. 도덕적으로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에 대한 두려움을 갖자. 그리고 창피함이란 감정을 기억하자.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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