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문해력과 공감능력

입력
2019.01.31 04:40
수정
2019.01.31 09:1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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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금토드라마 'SKY캐슬'의 한 장면. 뛰어난 지성이 독특한 문해력을 갖는 비극은 드라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JTBC 제공
JTBC 금토드라마 'SKY캐슬'의 한 장면. 뛰어난 지성이 독특한 문해력을 갖는 비극은 드라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JTBC 제공

1월의 마지막 날, 여름을 추억하는 칼럼 한 대목 소개한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 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은 여름의 즐거움이다.(…)입을 크게 벌리고 앞니를 자두의 살 속으로 깊이 찔러 넣을 때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은 자두의 살과 한 덩어리가 된다.’ (김훈 ‘수박과 자두’)

‘덜 자란 동물의 살’ 같은 자두는 십수년 후 강동수의 소설 ‘언더 더 씨’에서 여고생의 젖가슴에 비유됐다. 세월호 참사 때 가라앉은 여고생이 바다 밑을 떠도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에서, 화자인 여고생은 죽기 전 자두를 먹던 장면을 이렇게 회상한다.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이 책은 이달 초 한 온라인 카페에 소개되며 참사 희생자를 성인물 주인공처럼 묘사한 ‘개저씨 문학’이란 비난에 시달렸다.

문제적인 건 작가와 출판사의 이후 행보다. 작가는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우리 사회 일각의 반지성주의가 끔찍하다’며 자기 소설을 옹호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과했다. 출판사는 ‘문해력의 차이에 따라 수용 수준이 달라질 수는 있다’고 대응했다가 ‘도대체 누구 문해력이 문제인 거냐’는 요지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입장을 철회했다.

문해력.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걸 넘어 처음 접하는 글의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당연히 글이 쓰인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다양한 독서 경험이 요구되지만 ‘언더 더 씨’ 논란에서 보듯 이 시대에 맞는 문해력을 갖추는 건 다른 방식의 노력도 필요하다.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제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를 독창적으로 읽어내는 드라마 ‘SKY캐슬’ 속 예서는 자사고 전교 1등이지만 남들 다 맞추는 국어 2점짜리 문제를 자주 틀린다.

뛰어난 지성이 독특한 문해력을 갖는 비극은 드라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2015년 대법원은 ‘KTX 여승무원도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및 승객대피 등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이란 이유로 KTX 여승무원의 도급을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28일 제주지방법원은 ‘피고인들의 과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했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공장 기계에 끼여 숨진 고교생 이민호군이 근무했던 업체 대표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같은 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자신을 ‘누명 쓰고 쫓겨난 조강지처’에 비유했다가, 축첩을 당연하게 여겼던 전근대 가부장제를 암시하는 남성중심적 표현이란 지적에 “그것과 성평등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일부에서 여성비하 운운하는지 참 어이가 없다”고 대꾸했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만 나열해도 지면이 모자란다. ‘오늘날 미성숙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문학평론가 신형철)이다.

‘성숙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신형철 ‘굿바이, 박정희’)

“예서는 멘탈이 약한 아이입니다.” 멘탈을 전인격의 한 요소로 본다면 드라마 속 김주영 선생의 진단은 타당한 구석이 있다. 21세기 문해력의 충분조건에는 감수성과 공감능력이 포함돼야 한다. 문맹은 혼자 불편할 뿐이지만, 문제적 문해력은 범사회적 해악을 끼친다.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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