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 기행] “20대 시절 단골이 손녀와 찾아와요” 수제화 자존심 의흥덕양화점

입력
2019.01.26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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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에 있는 의흥덕 양화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17일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에 있는 의흥덕 양화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가죽 구두는 과거 서양식 신발, 양화(洋靴)라고 불렸다. 1954년 국내 최초로 기성품 구두를 출시한 금강제화 옛 이름도 금강양화다. 금강양화가 설립되기 수년 전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에 작은 양화점이 문을 열었다. 인천 토박이나 시장 상인들에게 중국 양화점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의흥덕(義興德) 양화점이다.

의흥덕 양화점 창업주인 고 곡유의(1988년 사망) 사장은 1920년 중국 산둥성(山东省) 옌타이시(烟台市) 무핑구(牟平区)에서 태어났다. 곡 사장은 1940년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국공내전이 발발하기 전 강제 징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맨몸으로 고향을 떠났다. 이후 한국에 정착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친구와 함께 신포시장에서 채소를 팔았다.

신포시장 전신은 19세기 말 생겨난 푸성귀전(채소시장)이다. 이 곳 상인들의 대부분도 곡 사장처럼 산둥성 출신 화교였다. 이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씨앗들을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심었고 수확한 채소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채소장사와 허드렛일로 밑천을 마련한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신 만의 일을 찾아 나선 그는 고민 끝에 집안 가업으로 내려온 신발 만들기에 올인키로 했다. 인천도시역사관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곡 사장의 부친은 고향에서 자전거로 산 너머 장터를 오가며 수를 놓은 전통 신발을 팔았다. 곡 사장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신발 만드는 일을 배우며 자랐다.

곡 사장은 결국 신포시장 채소가게 사이에 ‘의흥덕 양화점’을 차렸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가게는 공방이 딸린 33㎡ 남짓한 크기였다. 인천도시역사관 조사보고서에선 의흥덕 양화점이 문을 연 시기를 1940년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 보고서엔 양화점이 1950년 6ㆍ25 전쟁으로 잠시 문을 닫은 뒤 1955년 다시 개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현재 경영주인 곡유의 사장 셋째 아들 곡덕성(60) 사장은 양화점이 문을 연 시기를 6ㆍ25전쟁 직후로 기억하고 있다.

곡 사장은 다른 화교들처럼 가족들과 함께 가게를 꾸려나갔다. 가업을 보존하는 동시에 종업원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당시 귀했던 구두만큼 구두 기술자 임금도 비쌌다. 1959년 인천에서 태어난 곡덕성 사장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발 만드는 일을 배웠다. 곡덕성 사장은 “6남 2녀인데, 현재 대만에 거주하는 다섯째 아들을 제외한 형과 누나, 동생들이 다 이쪽(신발 사업) 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10여년 전 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 받았는데, 그때부터 큰 형과 형수, 막내 동생과 함께 꾸려왔다”고 말했다.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내 의흥덕 양화점에 구슬 신발들이 진열돼 있다.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내 의흥덕 양화점에 구슬 신발들이 진열돼 있다.

의흥덕 양화점은 남성 구두, 여성 부츠, 아동화 등 다양한 수제화를 만들어 팔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인기 제품은 굽이 낮은 중국 전통 신발 모양의 여성화다. 발등 부분에 알록달록 자수와 함께 구슬이나 반짝이 장식이 달려있는 게 특징이다. 손님들 사이에선 구슬 신발로 불린다. 이 제품들은 입소문을 탔고 손님들도 몰고 왔다. 높은 굽의 제품이나 샌들, 슬리퍼 형태의 구슬 신발도 있다.

구슬 신발 반짝이 장식은 곡덕성 사장 형수인 주요용(60)씨의 수작업 작품이다. 이달 21일 양화점을 찾았을 때도 주씨는 검은색 우단(벨벳)에 반짝이 장식을 수놓고 있었다. 정확한 도안도 없이 흰색 분필 자국만 몇 가닥 있는 우단에 바늘이 지날 때마다 반짝이 장식이 꽃처럼 피었다.

주씨는 “우단이나 가죽 위에 수를 놓는데 기분이 좋으면 한 켤레당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고 기분이 나쁠 때는 2시간도 걸린다”며 “1980년에 시집 와서 처음 수놓는 것을 배웠으니 이 일을 한지도 벌써 40년 가까이 됐다”고 말했다.

주요용씨가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내 의흥덕 양화점에서 우단에 반짝이 장식을 수 놓고 있다.
주요용씨가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내 의흥덕 양화점에서 우단에 반짝이 장식을 수 놓고 있다.

의흥덕 양화점 전성기는 구슬 신발이 인기를 끈 19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신포시장을 비롯한 신포동 일대는 인천 최대 번화가이기도 했다. 구슬 신발은 특히 여학생과 아가씨에게 인기를 끌었다. 바쁠 때는 구두를 주문하면 길게는 한 달이 걸려야 찾았다. 구두를 맞추기 전, 발 모양을 그리고 사이즈를 적어 놓은 계량지 100장짜리 한 묶음이 하루에 하나씩 없어지던 시절이었다. 한 밤에 신발을 맞춰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손님까지 나올 정도였다.

곡덕성 사장은 “온 가족들이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신발을 만들었지만 주문이 밀려 손님들이 신발을 찾으려면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한 달이 걸렸다”라며 “한 여자 손님은 한달 걸려 신발을 찾아가면서 가게 밖에서 ‘드디어 찾았다. 이런 집은 신문에 꼭 나와야 한다’고 소리쳐 기억에 남는다”라고 전했다.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내 의흥덕 양화점에 다양한 수제 신발들이 진열돼 있다.
인천 중구 신포국제시장내 의흥덕 양화점에 다양한 수제 신발들이 진열돼 있다.

굴곡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신포동 일대가 인천 최대 번화가 자리를 내놓고 쇠퇴하면서 의흥덕 양화점을 찾는 손님들도 줄어든 것.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이후엔 불황까지 겹쳤다. 그래도 아직까지 구슬 신발을 기억하는 단골 손님들은 반갑다고 했다.

주씨는 “20대 때 단골로 만나서 80대에도 다시 찾아오거나 아들딸과 손자손녀를 데리고 오는 손님, 이민을 가서 한국에 들어올 때면 선물한다고 몇 켤레씩 사가는 고객, 길을 지나다가 ‘아직도 이 자리에 있었네’라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들도 있다”며 고마워했다.

하지만 진짜 위기기는 지금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의흥덕 양화점에서 신발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후계자가 없어서다. 강요는 하지 않기로 했다. 전통을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곡덕성 사장도 50대 때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폐렴에 걸려 대형병원에서 2년 6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당시 기관지 벽이 손상돼 기관지 확장증을 얻기도 했다. 오랫동안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몸에 성한 곳도 드물다.

“자식들이 다들 직장이 있고 30대라서 이제 와서 기술을 배우기도 늦었어요. 누가 갑자기 나타나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양화점을 다음 대까지 이어서 운영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곡덕성 사장의 목소리에선 진한 아쉬움이 전해졌다.

글ㆍ사진 이환직 기자 slamh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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