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나의 재산은 소유 아닌 향유

입력
2019.01.24 04:40
31면

나는 꽝꽝 얼어붙은 겨울 들판을 걷는 것도 좋아한다. 벼 그루터기가 폐사지의 탑들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는 마른 논배미, 논둑밭둑에 찰싹 달라붙어 인고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민들레 냉이 달맞이꽃 같은 로제트 식물들, 야산 숲의 푸서리에서 내 기척을 듣고 놀란 듯 솟아오르는 텃새들의 비상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야생의 겨울 들판. 이처럼 내가 들판을 좋아하는 건 어머니 대지의 젖을 빨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이리.

오늘도 미세먼지 나쁨 수준이었지만, 나는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마을 농로를 걸었다. 걷다가 만난 길고양이들,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개들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더라. 야산 옆을 지날 때 푸드득 날아올라 나를 놀라게 한 새들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더라. 고양이나 개를 극진히 애완하는 이들은 앞으로 고양이나 개가 쓸 마스크를 만들어 씌울지도 모르겠다. 모진 겨울을 살면서 던져보는 농담이지만, 미세먼지 자욱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면 나도 마스크 따위 착용하지 않으리라. 대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생존의 위기를 겪는 때에 나만 딱히 오래 살고 싶진 않으니까.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농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밤나무 군락지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랐다. 나도 놀랐지만 고라니는 얼마나 놀랐을까. 오 미안해, 고라니! 몇 다락 논배미를 가로질러 건너편 야산으로 겅중겅중 빠르게 도망치는 고라니는 이제 막 엄마 젖을 뗀 새끼 같았다. 어린 짐승이 인적 가까운 밤나무 숲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온 걸 보면 혹한의 날씨에 먹이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저런 야생의 짐승들을 보면 시골살이가 힘들다고 엄살을 떨 수 없다. 문명의 온갖 이기에 길들면서 편리와 속도와 효율이라는 삶의 방식이 몸에 밴 이들은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견디지 못한다. 어머니 자연의 젖을 너무 일찍 떼고 문명의 이기에 접속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 자연과의 공존을 소중히 하지 않고 인간 중심의 욕망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이리라.

미세먼지 때문에 아우성을 치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가져온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지는 않는다. 첨단의 과학이나 인간 욕망을 극대화한 제도정치가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눈에 보이는 금화만 재산으로 여기는 이들은 생존의 문제조차 금화가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니까. 그들은 지구의 소중한 재산인 공기나 물 같은 것을 여전히 깔볼 테니까. 만일 우리가 맑은 공기와 청정한 물을 확보할 수 없다면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과 식물의 생존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동물과 식물이 지상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의 보존은 야생성에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거부(巨富)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재산은 무한합니다… 내 은행잔고는 아무리 꺼내 써도 다 쓸 수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다 농로 옆의 산수유 가로수에 매달려 있는 박주가리 열매에 눈길이 멈췄다. 손을 뻗어 딱딱한 열매를 하나 따서 열었더니, 솜털 같은 흰 면사가 달린 씨앗이 드러났다. 바람이 불면 곧 깃털을 펼쳐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박주가리 씨앗은 새가 되고 싶은 꿈을 품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 씨앗의 꿈은 소유가 아닌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리는 향유가 아닐까. 나는 박주가리 열매를 둘러싼 껍질 속의 씨앗이 달린 부드러운 면사를 몇 올 뽑아내어 후후 불어 날렸다. 그것들은 새의 깃털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멀리멀리 날아갔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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